Sweeter than Honey | 말씀곱씹기 단맛이 날 때까지/갈라디아서 [자유케 하는 복음]

갈라디아서 5장 11-12절

Apis 2022. 10. 9. 23:28

11-12 내가 (다마스쿠스 길에 들어서기 전에 그랬듯이) 지금도 계속해서 할례의 방식을 전하고 있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내가 지금도 박해를 받겠습니까? 내가 그 낡은 메시지를 전하면서 이따금 십자가를 언급한다면, 아무도 기분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처럼 물에 물 탄 듯한 메시지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할례에 집착하여 여러분을 선동하는 자들은 아예 끝까지 가서 거세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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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교인들에게 율법주의를 피하도록 강변하던 바울 사도는, 이제는 자신까지 들먹이며 말하는 율법주의의 거짓됨을 폭로합니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바울 사도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율법주의가 참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예전에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갈 때처럼, 할례를 지키라고 했다면 유대인들이 자신을 왜 핍박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그들(율법주의자)처럼 그 낡은 메시지(율법주의)를 전하면서 이따금 십자가를 언급했다면, 아무도 기분 상하지 않고 자신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할례가 중요하다고 선동하는 사람들은, 그 중요한 할례를 상징이 아닌 원래 의미대로 받아들여 생식기를 잘라내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처음 그 소식을 들은 마리아에게 메시아를 낳게된다는 기쁨과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로서 아이를 낳는다는 부담과 이 일이 사랑하는 요셉에게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부담을 함께 전달했습니다. 생업에 종사하다가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은 제자들도 기쁨과 함께 부담을 감당했습니다. 네 집에 유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뻐하던 삭개오는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부담을 느끼며 자신의 소유 절반을 기꺼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놓으며 기쁨을 지켜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언제나 듣는 이들에게 기쁨과 함께 부담이 되었습니다. 부담 때문에 기쁨을 포기하는 자들은 종종 있었지만, 누구도 부담을 거절하고 기쁨 만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지금 유대인들로 인한 부담을 떼어내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살아오던 방식과 갈등없이 부담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과 기쁨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복음에서 부담을 떼어내는 순간 복음은 물에 물 탄 듯한 메시지로 전락해 아무런 능력도 없는 메시지가 됩니다.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담겨있는 복음이, 나를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처럼 새로운 창조의 수준으로 역사하던 복음이 아무 능력 없는 소리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은 기쁨과 함께 복음으로 인한 부담까지도 받아들이는 삶에서만 비로소 놀라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싯말 중에 [사랑한다는 것은 / 결국 고통까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 그런 것들을 / 피하지 않고 간다는 것입니다. // 사람이 서로 살며 / 사랑하는 일도 그렇고 / 우리가 /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합니다. / 사랑은 / 우리가 우리 몸으로 선택한 고통입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싯말을 쓴 이는 다른 시의 제목은 [아픈 사랑일수록 그 향기는 짙다] 고 붙였습니다. 원리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부담이 크게 임한 복음은 받아들인 사람에게 역사하는 능력이 크고, 아픔을 이겨내며 이루어야 하는 순종은 그로 인해 누리게되는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나는 복음을, 그리고 말씀을 받으면서 기쁨과 부담을 나누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복음에서 부담을 떼어내는 순간 복음의 능력 또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게 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