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1 율법에 흠뻑 빠진 여러분, 내게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율법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까? 기억하겠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종의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인 여인의 아들입니다. 여종의 아들은 인간적인 묵인 아래 태어났고, 자유인 여인의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잘 설명해 줍니다. 그 두 출생 방식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두 가지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중 하나는 아라비아의 시내 산에서 생겨난 방식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삶, 곧 끊임없이 종을 만들어 내는 종의 삶입니다. 바로 하갈의 방식입니다. 반면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예루살렘 곧 자유로운 예루살렘이 있는데, 그 예루살렘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사라의 방식입니다. 이사야가 기록한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즐거워하여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아!
환성을 올려라,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아!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의 자녀가
선택받은 여인의 자녀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친구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갈과 사라의 시대에는, 부정한 묵인 아래 태어난 아이 이스마엘이, 신실한 약속으로—성령의 능력으로—태어난 아이 이삭을 괴롭혔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루살렘 출신의 이단자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의 되풀이라는 점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찌해야 하는지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종의 아들은 자유인 아들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인 여인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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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에 휘둘리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율법주의자들의 본질을 말하던 바울 사도는 이제 율법이 증거하는 내용을 가지고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율법 아래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여, … 여러분은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까?] 여러분이 흠뻑빠진 율법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킨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있었던 일을 구체적 증거로 제시하며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믿음의 삶과 율법의 삶을 잘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똑같이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출생방식이 달랐습니다. 한 아들은 본처에게서 낳고 또 다른 아들은 종에게서 낳습니다. 본처가 낳은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태어났고, 여종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은 인간적인 계산(잔머리)으로 태어났습니다. 약속으로 태어난 아들은 [자유]를 누리도록 태어났고, 종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결국 종의 신분으로 - 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믿음)과 율법(율법주의)의 관계를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은 자유를 누리게 되지만, 율법아래(=율법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계속해서 율법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이삭이 그보다 장성했던 이스마엘에게 희롱당하였던 것 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사는 우리도 율법의 종으로 살아가는 율법주의자들에게 미혹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종의 아들은 자유인 아들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당하고 있는 율법주의로 인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겠습니까? 너무 분명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율법에 매인 종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선택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도 잘아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에 이런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마엘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복음과 율법이 좀 더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약속은 받았지만,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급해진 아브라함은 사라의 생각(잔머리)을 따라 행함으로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약속(복음)을 받은 우리가 율법으로 살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약속(복음)을 믿음으로 붙들고 있으면 되는데, 여전히 예전의 죄 된 모습 그대로인 것만 같은 나를 보며 조급해 질 때, 율법적인 생각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은 나의 삶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조바심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안되는 내 모습을 그대로 주님 앞에 꺼내어 놓고 고백하며 몸부림칠 때 비로소 누려지는 능력입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느끼고 고백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나는 종종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다고 착각하며 서둘러서 그 방법을 찾을 때, 율법적인 방법들이 좋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마보십리(馬步十里)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처럼 느릿느릿 걸어도 반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천리길에 이를수 있다는 뜻으로 서두르지 말고 끈기를 가지고 묵묵히 한걸음씩 내딛으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걸음을 기꺼이 걷도록 하기 위해 주일이 필요합니다.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나만 외롭고 힘겹게 이러는 것이 아니라 이 걸음을 함께 걷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눈빛으로 확인할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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