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er than Honey | 말씀곱씹기 단맛이 날 때까지/갈라디아서 [자유케 하는 복음]

갈라디아서 5장 1-6절

Apis 2022. 9. 26. 14:10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게 서십시오! 그 누구도 다시 여러분에게 종의 멍에를 씌우지 못하게 하십시오!
2-3 나는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할례를 받고 여타의 율법 체계에 굴복하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애써 쟁취하신 자유라는 선물은 사라지고 맙니다. 거듭해서 경고합니다. 할례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삶의 유익을 율법이라는 종의 삶의 의무로 바꾸는 자입니다.
4-6 나는 여러분이 의도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종교활동에 기대어 살려고 하는 순간,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이며,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과의 만족스러운 사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교적 의무를 성실히 준수하거나 무시하거나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내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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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  

 

믿음 안에서 만났던 분들 중, 제법 많은 분들이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셨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여쭈어 보면, 그분들이 공통적으로 하셨던 대답은 [더 깊이 믿으면 하나님께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못하게 하시잖아요]였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대개의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간다고 하는 내 마음 깊은 곳 한 구석에도 아직 이런 마음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 잘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하나님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그냥 다 잊고 내 멋대로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결국 넘어지며 다시 부끄러운 자리로 돌아가는 삶의 반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치 수영을 배울 때, 물 위에 떠서 조금씩 나아가며 자신감을 얻어가다가도 [그곳은 좀 깊어요]라는 말에 두려워져 온 몸이 굳어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확인되는 것은 나름 잘하는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수영 실력이 아니라 착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아직 수영을 잘하고 못하고를 말할 수 없는, 물을 두려워하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수영을 잘하는 것은 물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깊은 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깊을수록 부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편하게 수영합니다. 그 경지를 넘어서면, 그다음에는 거센 파도를 향해 서핑보드와 함께 몸을 던지며 그 파도를 즐기기도 합니다. 수영을 배울 때, 이런 사람을 만나서 이런 경험과 느낌을 전해들으며 수영을 배울 수 있으면, 훨씬 빨리 물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수영을 배울 수 있습니다. 수영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즐기는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교인들에게 그 느낌과 경험을 이렇게 전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이 자유를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고 하면 자유라는 선물을 잃게 된다는 경고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 사도는 복음 안에서 자유로이 서핑을 즐기는 수준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바울 사도와 함께 믿음으로 수영? 하는 법을 배운다면 [믿음과 복음이라는 물]이 조금 더 편해지고 즐거워질 수 있습니다. 쉽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복음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강조하는 핵심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종교활동에 기대어 살려고 하는 순간], 복음 안에서 편안함을 잃고 허우적거린다는 것입니다. 종교활동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하면, 자유롭게 머물던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결과를 맞이한다고 합니다. 내가 [종교활동 = 무엇인가를 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생각을 품는 것]은 내 몸이 굳어지게 만들어서 더 이상 은혜 위에 떠 있을 수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만족스러운 사귐] 만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힘을 빼고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데 자꾸 더디게 자라나는 나의 믿음의 모습을 보며 느끼는 부담에 무엇이라도 내가 해보려 하는 순간, 자유를 잃고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은혜와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원리를 말합니다. 먼저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교적 의무를 성실히 준수하거나 무시하거나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이유가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닌 것을 떠올리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첫 번째 원리를 잊지말고 자꾸 무엇인가를 해서 나를 보여주려 하기보다는 [사랑을 통해 믿음을 확인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다르게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내 마음 중심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중심입니다.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무엇이 아니라 마음 한 가운데 무엇을 담아 놓았느냐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합니다. 조건 없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충분히 누리고 또 누리다 보면, 그 사랑과 그 은혜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워서 흘러나오게 되는데, 그렇게 감동과 감사가 넘쳐흐를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넘쳐흐르는 감사와 감동이 내 삶 전체를 저절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물에서 힘을 빼면 된다는 수영의 비결처럼, 참 쉬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수영을 배우기 위해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먼저 우선되어야 하는 것처럼, 믿음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런 원리를 삶으로 체득했던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밝히면서, 그 앞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심]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자유를누리지 못하는나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힘입어 두려움을 이겨내기 원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두려움을 떨쳐내고 나를 온전히 맡김으로,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