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er than Honey | 말씀곱씹기 단맛이 날 때까지/갈라디아서 [자유케 하는 복음]

갈라디아서 3장 2-6절

Apis 2022. 8. 28. 14:38

[메시지성경  |  갈라디아서 3장 2-6절]

2-4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새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죽도록 노력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응답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이 어리석은 짓을 계속하렵니까? 정신 나간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 일을 시작할 만큼 슬기롭거나 강하지도 못하면서, 어찌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학습 과정을 거친 것이 다 허사였다는 말입니까? 아직 완전히 허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닙니다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분명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5-6 대답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신의 임재, 곧 성령을 아낌없이 주셔서 여러분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신 것이, 여러분의 부단한 도덕적 열심 때문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안에서 그 모든 일을 행하시는 그분을 믿어서입니까? 이 모든 일이 여러분에게서 일어난 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의 행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

 

율법주의를 곁눈질이나 딴 생각이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서 옮겨놓는 행위] 이며, 실수가 아닌 본질의 문제로 밝힌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에게 묻습니다. 율법주의적 삶에 매료된 성도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율법주의에 눈길이 가는 나에게 다시금 복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새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바울 사도는 이 질문을 2지 선다현으로 묻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죽도록 노력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까? 2) 각자가 받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응답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까? 

 

이렇게 새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떠올리게 한 바울 사도는 다시 질문합니다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여러분이 그토록 고통스러운 학습 과정을 거친 것)이 다 허사였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바울 사도는 질문을 통해 복음이 일하는 방식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새번역)]. 이 질문은 나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나)자신의 힘으로 …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받은 구원을 떠올려야 합니다. 내게 은혜가 찾아온 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은혜를 누리고, 구원의 감격을 누린 것이 아니라면… 오늘 나의 삶에 다가오시는 은혜도, 평강도, 기쁨도 내가 무엇을 함으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을 읽고 정리하는 것은 참 쉽고 분명한데, 삶에서는 이 일이 왜 그렇게 어렵고 안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를 했었는데, 갑자기 그 일이 정말 실망스러운 결론으로 마무리 되면, 내 기도에 문제가 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일상 중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오늘 묵상의 시간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돌아봅니다… 나를 돌아보는 태도처럼 보이지만, 이런 생각의 깊은 곳에는 내가 하나님을 향해 노력하면 하나님이 그 노력에 반응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 율법주의적 기대가 담겨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러면 가만히 있는 것과 기도하고 묵상하는 삶의 차이가 무엇인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도대체 믿음을 가지고 산 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 입니까 라고 묻고 싶어집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도 되는지]를 물은 이들이 있는 것처럼,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복음의 자유를 볼 때 나오는 질문입니다. 논리로만(논리로라도) 복음을 이해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단계를 넘어왔습니다. 아니 더 멀리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만큼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하며 산다는 것입니까? 믿음이 아닌 삶과 어떻게 다릅니까?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이들에게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의 행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 [믿음은 천국을 여는 열쇠]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가면, (내 주 예수 모신 곳) 그 어디에서나 하늘나라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허락된 이유입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받았는데, 우리의 눈에는 자꾸 이 땅이 보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평판을 생각하며 선한 행위로 나를 치장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시선을 떠올리며 경건한 말과 의롭게 보일 행동으로 내게 덧칠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가 아니라 문제는 동기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누리게 하신 것이 천국이라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천국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온전히 누리려면 믿음의 열쇠를 가지고 열어야 할 궁극의 목표인 천국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이 땅의 것들을 그것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재물과 생명을, 공중의 새와 우리들을, 들풀과 솔로몬을비교하시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어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천국을 구하면 땅의 모든 것은 덤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천국의 가치를 확인하고 누릴 있기를 소원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열고, 교제 안에서 천국을 누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