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er than Honey | 말씀곱씹기 단맛이 날 때까지/요한계시록(~ing)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 6장 1-8절

Apis 2024. 9. 1. 22:30

 1-2 나는 어린양이 일곱 봉인 중 첫째 봉인을 떼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나는 그 동물 가운데 하나가 포효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오너라!” 내가 보니, 흰 말이 보였습니다. 그 위에 탄 이는 활을 들고 있었고 승리의 면류관을 받아 썼습니다. 그는 좌우로 승리를 거두며, 의기양양하게 나아갔습니다.
3-4 어린양이 두 번째 봉인을 떼시자, 두 번째 동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오너라!” 또 말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붉은 말이었습니다. 그 위에 탄 이는 땅에서 평화를 없애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목 조르고 죽이도록 했습니다. 그에게는 거대한 칼이 주어졌습니다.
5-6 어린양이 세 번째 봉인을 떼시자, 세 번째 동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오너라!” 내가 보니, 이번에는 검은 말이었습니다. 그 위에 탄 이는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 한 메시지가 들려왔습니다(이는 네 동물에게서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 품삯으로 고작 밀 한 되, 혹은 보리 석 되를 살 수 있을 뿐이다. 기름과 포도주는 꿈도 못 꾼다.”
7-8 어린양이 네 번째 봉인을 떼시자, 네 번째 동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오너라!” 내가 보니, 핏기 없는 창백한 말이었습니다. 그 위에 탄 이는 죽음이었고, 그 뒤를 지옥이 바싹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들짐승들로 땅의 사분의 일을 멸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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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문제를 가지고 전문가들에게 나올 때, 어떤 경우는 그들이 말하는 문제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본질적인 문제를 확인하기 위한 다양한 검사들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문제의 본질을 밝혀가는 과정은 결코 문제를 가져온 사람들에게 유쾌하지 못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 땅의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과 치료의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치료과정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편안하고 유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내가 보는 것보다 더 깊고 멀리 보시는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문제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고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진단과 치료의 과정이 나에게 불편하고 어렵지만, 하나님은 그다음을 보시며 기꺼이 나를 그 과정에 밀어 넣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고치시는데 즐겨 사용하시는 과정은 고난입니다

본문에서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기 시작합니다. 일곱 인은 하나님의 심판이 담긴 문서입니다. 일곱 인은 봉인으로써 수신자만 열어서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 봉인은 뜯어보는 순간 효력을 발생합니다. 이제 어린양은 그 봉인을 하나씩 떼어나갑니다. 그리고 그 봉인이 열리는 때, 하나님의 심파도 시작됩니다. 

심판이란 무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른 것들이 인정받고 구원받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못된 것들이 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길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이 심판이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을 통해 잘못된 모든 것들이 새롭게 정화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며 믿음 안에 있는 내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의 참 소망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있는지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사는 것이 나의 소망일 수 없습니다. 그저 이 땅에서 많이 누리고 잘 사는 삶이 나의 목적이 아닙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이 없는 삶,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지 않는 삶,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기도의 목표인 삶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나를 바꾸어 놓기 위해 하나님은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하나님이 말씀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고난과 아픔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말씀에 근거해서 다가올 세상을 준비하며 살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끝이 있다는 종말론적 신앙을 갖지 못하면, 믿음은 율법적 도덕주의와 기복주의 신앙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고, 이 모든 것들에 끝이 있다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질 때에만 이 세상에 살지만 절제할 수 있고, 이 세상의 행복을 우습게 여길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어린양이 하나님의 일곱 인을 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이를 통해 나는 하나님의 참된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형태로 임하는 것일까요? 계시록의 내용이 어렵고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시작된 심판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일곱 인 / 일곱 나팔 / 일곱 대접...

그런데 이것은 일곱 인 다음에 일곱 나팔, 그다음에 일곱 대접으로 계속되는 환난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순으로 21 차례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되어질 것들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입니다. 이것은 마치 카메라를 여러 대 설치해서 달리는 기차에 대한 영상을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카메라에는 열차가 달려와서 지나가는 장면이, 또 어떤 카메라에는 멀리서 롱테이크로 다리는 기차의 모습이, 또 어떤 카메라에는 기차 내부에서 밖을 촬영한 영상이 찍혀서 모아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차가 세 번 네 번씩 그 길을 반복해서 달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리고 구속의 바퀴가 힘차게 구르는 모습을 여러 카메라에 담았는데, 요한 사도는 그것을 영상편집하듯 편집할 수 없으니 카메라에 찍힌 장면을 한 카메라씩 확인하며 묘사한 것입니다. 보는 관점이 달라서 다르게 보이지만, 이것은 진행되는 역사의 전체 그림입니다. 

 

첫째 인을 떼자, 흰 말을 탄 자가 면류관을 가지고 이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자기 힘을 과시하려는 자, 이 세상에 전쟁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이기고 이기려고 하는 것으로서, 세상의 성공주의와 이에 따르는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인을 떼자 붉은말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말의 색깔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는 역할이 중요합니다. 서로 죽이게 하는 내란과 혼란을 말합니다.
셋째 인을 떼자 검은 말이 손에 저울을 들고 나옵니다. 불평등과 억압, 땅의 기근, 빈익빈 부익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밀 한 되와 보리 석 되가 한 데나리온에 팔리고 있습니다. 하루 품삯을 십 분의 일만 주고 있습니다. 저울이 잘못되어 힘들고 어려운 자들, 가난한 자들이 겪는 실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해석은, 주께 속한 자를 해치지 말라는 해석과 감람유와 포도주를 부자들의 음식으로 보아 힘 있는 자들을 살려주고 가난한 자들을 더욱 불안하게 하는 사회 부정의를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네 번째 인을 떼자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잿빛 얼굴로 시신의 얼굴색이라고 합니다. 음부가 따라오는데 검과 흉년, 사망입니다. 이 사망은 전염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흉년과 전염병으로 땅의 사분의 일이 죽어 나가는 일이 있게 됩니다. 여기서 사분의 일은 심판이 계속되는 것을 보여주며 그다음에는 삼분의 일 그리고 온 땅에 임하게 됩니다.

 

이것들은 이렇게 역사 속에 항상 있었던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보게 되면, 이 세상의 기근과 전염병, 사회의 부정부패와 물질 중심의 상황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지금 뭐 하시나? 가 아니라, 이 모든 것들 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을 깨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분명 성도들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내 입에서 주여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니이까 탄식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 그렇게 느껴지는 그 시간들이 결국 하나님의 일들이 진행되고 역사가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성도인 내게 주어진 일은 세마포 옷을 입고 신랑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체스(장기)를 둘 때 보통 3가지 경우로 결론이 납니다. 한 가지는 체크메이트를 통해 승리하는 것, 또 한가지는 둘이 비겨서 승부를 가리지 못하는 것, 마지막 한가지는 외통에 몰려서 수를 찾지 못한 사람이 판을 뒤집고 일어나는 방식입니다.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는 체스게임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당장 판을 뒤집고 지금 무엇인가를 하셔야 된다고 기대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라고 답하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자신에게 지금 당한 고난이 너무 견디기 힘들다 느끼는 이들도 이와 비슷하게 반응합니다. 이런 부르짖음은 예언서에서 시편에서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애굽에서 고난당하던 이스라엘의 탄식하며 부르짖던 부르짖음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오늘 본문 속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로 이어집니다. 또 오늘을 사는 나의 입술의 탄식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앞서서 4장과 5장에서 승리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어느 때까지인지 묻는 제단아래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들처럼 순교자가 될 이들의 수가 다 채워질 때까지 더 앉아서 기다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시작하신 구속의 일들을 당신의 정하심에 따라 진행하시는 분이시지, 결코 감정적으로 체스판을 엎듯이 뒤집고 일어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일컫는 호칭은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신실하심은 믿음의 견고한 기초가 됩니다. 

 

오늘도 내 삶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새롭게 충만해지기를 기대합니다. 내 생각과 계획보다 훨씬 크고 높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그저 겸손함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