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그래서 내가 보니, 한 어린양이 보좌와 동물과 장로들로 둘러싸여 계셨습니다. 그분은 전에 도살되었으나 이제 우뚝 서 계신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분은 일곱 뿔을 가졌고 또 일곱 눈을 가졌는데, 그 눈은 모든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일곱 영이었습니다. 그분이 보좌에 앉아 계신 분께 가서, 그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드셨습니다. 그분이 두루마리를 받아 드는 순간, 네 동물과 스물네 장로가 바닥에 엎드려 어린양께 경배했습니다. 각각 하프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들고 있었는데, 그 향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합당하십니다!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그 봉인을 떼소서.
죽임당하신 분! 주님은 피로 값을 치르시고 사람들을 사셨습니다.
그들을 온 땅으로부터 다시 데려오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로 다시 데려오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한 나라와,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과
온 땅을 다스리는 제사장-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11-14 나는 또 보았습니다. 보좌와 동물과 장로들 주위에서 수천 수백만 천사들이 큰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은 합당하시다!
권능과 부와 지혜와 능력을 받으소서!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소서!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땅 밑과 바다의 모든 창조물이, 모든 곳의 모든 목소리가, 다 함께 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분께! 그 어린양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토록!
네 동물은 “오, 그렇습니다!” 하고 소리쳤고, 장로들은 무릎 꿇어 경배했습니다.
*****
본문이 계시록의 중심이고 열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하나님께 위임받은 권세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렇게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분의 모습은 어린양입니다. 그것도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예수님의 모습인 것에 왜 주목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요한의 앞에 이미 영광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현실 교회들을 향해 말씀하실 때도, 예수님은 스스로를 능력과 위엄의 모습으로 표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곁에서 네 생물과 스물 네장로의 경배를 받고 계십니다. 수천 수백만 천사들의 경배를 받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모든 권세를 위임받으셨습니다. 역사를 주관하는 주권자이시고 통치자이십니다. 그런데 어느 때보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하셔도 충분치 않은 상황이고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 예수님은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모습으로 자신을 내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상징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손에는 하나님께 넘겨 받은 두루마리가 들려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려진 봉인을 떼심으로 역사는 진행됩니다. 그런데 그 봉인을 떼시고 역사를 진행하시는 예수님은 죽임 당하신 어린양으로서 예수님이십니다.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호령하시고 통치하시며 부수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는 권세가 있으신데, 그분은 역사를 이끌어가실 당신의 모습으로 죽임당한 어린양-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앞으로 펼쳐질 역사 속에서 보여질 통치의 원칙이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심으로 세상을 이기신 죽임 당하신 어린양, 찢기고 상함으로, 낮아지고 섬김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원칙으로 세상을 통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펼쳐질 역사에 대한 예수님의 원칙입니다. 통치자로서 드러내신 하나님 나라의 통치 철학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이 원칙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방향과 목적을 이 원칙에 맞춰서 정해야 합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삶은, 결코 힘과 권세를 자랑하는 삶이 아닙니다. 나에게 억울함을 끼친 이들에게 보란듯이 되갚아주는 삶도 아닙니다. 내가 갖은 탁월함을 앞세워 우월함을 만끽하는 삶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들을 정리해서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믿음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살고있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내가 오늘 예수님의 원칙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드러내기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철학을 내 삶을 통해 드러내야 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켰습니다. 쳐서 복종시키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고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것을 보고 역사를 이끌고 계심을 알게 된다면, 힘겨운 그 길을 갈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다는 확실한 소망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눈이 열리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서 계신 예수님을,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모습으로 서 계신 나의 주님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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