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er than Honey | 말씀곱씹기 단맛이 날 때까지/창세기 11장부터 [믿음의 시작]

창세기 42장 26절 ~ 43장 14(1)

Apis 2022. 11. 29. 08:57

야곱의 아들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야곱이 보니 애굽으로 갈 때는 10명이 갔는데, 돌아오고 보니 9명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낱낱이 말씀드립니다. 그러면서 다시 애굽에 가서 시므온을 되찾고 양식을 사 오려면, 막내 베냐민을 데려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은 야곱이 "너희는 내가 얻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구나! 요셉도 없어지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이제는 베냐민마저 빼앗아 가려고 하는구나. 너희 말대로 하면, 내게 무엇이 남겠느냐.” 탄식합니다.

 

이에 르우벤이 자기의 아들들을 볼모로 맡기고,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자기의 아들들을 죽이셔도 좋다고 극단적인 약속까지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고,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양식을 더 구해오라고 합니다. 이에 유다가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양식을 구해오지 못한다고 다시 상황을 말합니다. 야곱이 [너희는 어찌하여 내 인생을 이토록 고달프게 하느냐? 도대체 어쩌자고 또 다른 아우가 있다는 말을 했느냐?] 짜증을 부립니다. 이에 유다가 야곱을 설득합니다. 

 

[제가 책임질 테니 그 아이를 보내 주십시오. 우리가 곧 떠나야겠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우리 가족 모두가 굶어 죽게 됩니다. 우리도 아버지도 우리 자녀도 다 죽게 될 것입니다! 그 아이의 안전을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그 아이의 생명과 제 생명을 맞바꾸겠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무사히 데려오지 않으면, 제가 죄인이 되어 모든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꾸물거리지 않고 갔더라면, 벌써 두 번은 다녀왔을 것입니다.] 유다의 설득을 들은 야곱이 마지못해 허락합니다.

 

우리가 잘아는 내용인데 2가지… 오늘은 이 중 한 가지만 먼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왜 르우벤은 야곱을 설득하지 못했고, 유다는 야곱을 설득할 수 있었는가?]입니다. 물론 가장 쉬운 대답은 [양식이 떨어져서 …]입니다. 분명 상황적인 절박함이 야곱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르우벤은 베냐민을 데려오지 못하면 자기 아들들을 죽이셔도 좋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잃을까 염려하는 아버지에게 자기 아들들(야곱의 손자들)을 죽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위로도 감동도 되지 못하는 설득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런 극단적인 표현보다는 자기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 그 아이의 안전을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그 아이의 생명과 제 생명을 맞바꾸겠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무사히 데려오지 않으면, 제가 죄인이 되어 모든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아들을 잃을까 염려하는 아버지에게 안됐을 경우에 대한 보상보다는 되도록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다가 아픔을 겪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들들을 잃은 유다는 누구보다 야곱이 껵고 있는 아픔이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아픔이나 보상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강조하며 야곱을 설득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픔을 겪지 않으면 위로도 설득도 안되는가?]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르우벤과 유다의 경험보다 더 큰 차이는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책임지겠다는 말에는 진심이 있지만, 르우벤의 보상 운운하는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뒤에 요셉이 베냐민을 가두겠다고 말할 때, 베냐민을 대신해서 갇히기를 청한 것은 유다입니다. 르우벤은 아들들의 목숨을 걸었지만 정작 상황 앞에서는 침묵했습니다. 유다의 진심은 지금 야곱을 설득해서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게도 했지만, 정작 요셉의 응어리지고 맺힌 마음을 풀어낸 것도 유다의 진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진심을 가지고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진정성을 담아서 …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미사여구로 진심과 진정성을 사용한다고 진심이 담기고 진정성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문구입니다. [뜨겁고 충만할 때  보다 차갑고 냉소적일 때 했던 말과 글이 더 오랜 시간 유효하다. … 실제로 모든 종류의 ‘진심’이란 의미 없는 호소이다. 진심, 진정성은 주관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남에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세상을 탓할 일도 아니다.] 차갑고 냉소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생각해 볼 내용인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내가 진정성을 담아 말하자면 …, 이런 표현은 어쩌면 내 말에 진심이 담기지 않고 진정성이 없기에 더 사용하게 되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진심과 진정성은 다른 것들로 포장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분명히 결단하고 정해진 것들만 말하면 저절로 담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정말 저 사람을 사랑하기로, 저 사람의 연약함을 채우고 섬기기로, 저 사람의 아픔을 위해 기도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실천해 내며 건네는 한 마디에는 따로 진심과 진정성을 운운하지 않아도 진심과 진정성이 전달될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가수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권태 속에 내 뱉어진 소음으로 주위는 가득하고 … ] 요즘시대는 인터넷을 통해 얼굴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말할 있고, 스마트 폰을 통해 얼굴을 대하지 않고도 다수에게 말하는 많은 소음으로 채워진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한마디에도 진심을 담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침묵이 아닌가 싶습니다. 굳이 말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기 보다는, 조용히 경청하고 그러다가 마음에 분명 한 것들을, 정확히 결정한 것들을 말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한마디를 통해 누군가에게는 치유가, 누군가에게는 평강이, 누군가에게는 소망이 전달될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