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er than Honey | 말씀곱씹기 단맛이 날 때까지/창세기 11장부터 [믿음의 시작]

창세기 34장 1절 - 31절

Apis 2022. 10. 6. 11:41

에서와 헤어진 야곱은 숙곳에서 잠깐 머물며 정리를 한 후, 요단을 건너 세겜으로 가서 거기  머무르고 있습니다.  세겜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의 도시로 교통의 중심지에 있는 제법 큰 도시였습니다. 세겜은 가나안에 있는 도시였지만, 야곱의 최종 정착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삭의 장막은 최남단 브엘세바 근처에 있었을 것입니다(형 에서의 근거지는 브엘세바에서 요단을 건넌 동편 지역입니다). 야곱은 브엘세바까지는 아니더라도 야곱이 단을 쌓았던 벧엘로는 돌아가야 했습니다. 세겜에서 벧엘은 천천히 가도 이삼일이면 도착할 만한 거리였습니다. 지금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돌아왔습니다. 이미 800Km 이상을 이동해 왔는데, 지금 벧엘과 브엘세바를 향해서는 갈 생각 없이 세겜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떠올리며 야곱이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번화한 세겜을 보고서 굳이 아무것도 없는 벧엘까지 가지 않아야 할 수십 가지 이유를 이미 떠올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야 할 걸음을 멈추고 세겜에 주저앉은 야곱,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야곱을 채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냥 지켜보셨습니다.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욕심은 알아서 사건과 사고를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성의 번화함에 마음을 빼앗겨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세겜 족장 하몰의 아들이 디나에게 마음을 빼앗겨 디나를 욕보였습니다. 디나에게 결혼을 하자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세겜의 족장 하몰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딸이 욕보임을 당하고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아버지인 야곱은 잠잠히 있습니다. 말씀은 그 이유를 아들들이 들에 있어서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라고 밝히십니다. 아들들이 들에 있어서 (= 힘이 없으니까) 지금은 참고 있습니다. 이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야곱이 의지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아들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힘, 자기 손에 쥐어진 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피해를 당한 야곱이 가만히 있으니까 하몰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결혼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 제안을 받는 자리에 야곱은 아들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몰에게 결혼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세겜 성의 사람들이 그 요구대로 할례를 행하자 야곱의 아들 중 시므온과 레위가 가서 세겜 성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성을 약탈하고 돌아옵니다. 

 

아들들이 사고를 더 크게 만들고 돌아오자 야곱은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아들들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너희가 이 땅의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사이에서 내 이름을 몹시도 추하게 만들었구나. 저들이 힘을 합쳐 우리를 치면, 수가 적은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저들이 나와 우리 가족을 다 죽이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사용해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지적이 아닙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들의 안녕을 위협하게 만든 일에 대한 지적일 뿐입니다.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 얍복강에서 붙들었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지금 야곱에게는 없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오로지 안전과 풍요에 대한 생각과 그것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대한 염려뿐입니다. 이런 야곱에게 아들들이 대답합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아버지에게 대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주전 2000년 경으로 추정합니다. 이 시대는 분명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입니다. 불과 100여 년 전 아브라함에게 결박된 이삭도, 그리고 20년 전 아버지의 축복에 목을 매던 에서와 야곱 형제도 분명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 아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정은 달라 보입니다. 세겜에 대한 대응을 결정할 때도, 세겜을 몰살한 후 나누는 대화에서도 가부장적인 권위를 가진 야곱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가장 지키기 어려운 교훈입니다. 어떤 분야이건 기본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본대로 풀어가야 합니다. 권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권위의 기본은 [권위가 어디로서부터 오는가?]입니다. [권세(authority)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말씀처럼 권위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를 내 삶 속에서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내 권위를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없는 것처럼 살아가자, 야곱의 모든 권위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 우리는 [권위가 상실된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권위]는 보통 자신들이 누려야 할 권위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권위가 상실된 시대]의 의미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치 않음에 있습니다. 물론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잘못된 권위를 남발하는 잘못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모든 권위를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해야 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 뿌리를 둔 권위가 내 삶을 세우며 삶의 자리에서 권위를 발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할 때, 내 말의 권위가 인정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함으로 반응할 때, 내 삶의 모습을 통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 야곱이 하나님의 권위를 거절하고 자신의 계산대로 살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가만히 놓아두셨습니다. 그러자 야곱의 인생은 권위가 사라지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권위(authority)는 무질서한 세상(chaos)에 질서를 부여하여 아름다운 세상(Cosmos)을 만드시고 유지해 가십니다. 

 

** 삶이 혼란스럽고 혼돈스러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가는 요즘, 다른 무엇보다 시급히 필요한 것은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권위이고, 권위에 순종하는 나의 마음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혼란과 혼돈을 이겨내고 나면, 그런 삶의 모습을 통해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질서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권위가 보여지게 것입니다.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엎드리며, 먼저 나의 삶이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로 채워지는 삶이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