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성경 | 갈라디아서 3장 21-27절]
21-22 그렇다면 율법은 약속과 반대되는 것,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의 취지는,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실 때까지 믿음으로 기다림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겠다고 종교 체계를 고안해 내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지 드러내 보이는 데 있습니다. 율법을 준수해서 우리 안에 생명을 창조할 능력이 있었다면, 우리는 벌써 생명을 얻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23-24 우리가 충분히 성숙해져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흔쾌히 응답하기까지,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 세심하게 둘러싸여 보호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은 여러분이 잘 아는, 그리스의 가정교사와 같습니다. 아이들을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아이들이 위험에 빠지거나 산만해지지 않도록 지켜 주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도와주는 가정교사 말입니다.
25-27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적지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직접 사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세례는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깨끗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례는 또한 성숙한 신앙의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옷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생명, 곧 하나님께서 처음 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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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복음과 율법 =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에 대해 설명하며, 율법주의(=율법적인 삶)에 대해 경계하던 바울 사도는 이제 그 주장에 대해 첫번째 매듭을 짓습니다. 그 결론은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인 복음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는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의로움과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가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를 지켜 죄를 알게하고 죄의 무게를 느껴 은혜를 갈망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Babysitter 처럼 부모님이 오시기까지는 아이를 돌보는 역할을 하지만, 부모님이 오시면 그 역할을 넘겨주고 물러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 복음이 찾아 오셨고, 우리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직접 사귀게 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는 새 생명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율법적인 삶을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세례(침례)입니다. 세례는 깨끗하게 씻었다는 것을 넘어, 죄와 이전의 율법적인 삶에 대해서 죽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을 보여주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새롭게 살아야지 하는 결심의 수준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은 이전 삶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새 삶을 허락하시며, 새 삶을 살게 된 이들을 모두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가져온 변화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변화를 설명할 적당한 말을 찾다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에서 그 단어를 찾아냈습니다[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의 구원은 창조만큼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저 내가 좀 좋아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런 나의 엄청난 존재적인 변화를 느끼는 것을 일반적으로 [복음을 깨달았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으면 삶이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고 이전과 다르게 새로운 창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이전과 똑같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겉핥기로 듣고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도 되냐]는 이들에게 결코 그럴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복음에 대한 이해에 비례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수록 풍성해 집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복음을 머그컵만큼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내 손에 쥘 수 있는 만큼 만을 붙들고서 그게 전부처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능력은 바다 같습니다. 아니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이니 무한합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손에 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복음에 몸이 잠기도록, 복음 안에서 제가 살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고서도 제가 발딛고 있는 현실에서 걸음떼기를 두려워합니다. 좀 더 용기를 내어 한걸음 내딛어야 하는데 두려움과 미련이 방해가 됩니다.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하는 예배는 그런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시간입니다. 나처럼 두려워 하는 이들도 만나지만, 그러던 누군가가 깊은 복음의 은혜 속에 잠겨가는 모습을 보는 시간입니다. 먼저 깊이 들어간 누군가로 인해, 그가 누리는 기쁨과 평안을 보며, 나도 슬며시 한발씩 담그면서 복음 속으로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그 일이, 함께 하는 이들로 인해, 먼저 발걸음 내딛은 그 사람으로 인해 기꺼이 누려지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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