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er than Honey | 말씀곱씹기 단맛이 날 때까지/사무엘상 [새 시대를 여는 사람]

사무엘상 1장 4-10절

Apis 2022. 12. 6. 11:00

엘가나는 제사를 드릴 때마다 아내 브닌나와 그녀의 모든 자녀에게 제사 음식을 한 몫씩 나누어 주었는데, 한나에게는 언제나 특별히 더 후한 몫을 주었다. 그것은 그가 한나를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의 경쟁 상대인 브닌나는 한나를 모질게 조롱하고 아픈 곳을 건드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신 것을 계속 의식하게 했다. 그런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하나님의 성소에 갈 때마다 한나는 으레 모욕당할 줄을 알았다. 한나는 끝내 눈물을 흘리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남편 엘가나가 말했다. “한나여, 왜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거요? 어찌하여 그토록 마음이 상한 거요? 내가 당신에게 열 아들보다도 낫지 않소?”

한나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 뒤에,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성소에 들어갔다. 제사장 엘리가 하나님의 성전 입구의 늘 앉는 자리에 앉아서 직무를 보고 있었다. 슬픔에 잠긴 한나는, 괴로운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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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예배해야 하는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각 책마다 담겨진 특별한 주제 질문에 초점을 맞추어 읽으면, 성경을 읽는 것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고 흥미가 더해집니다. 예를 들어, 사사기의 경우 핵심이 되는 질문은 [누가 우리의 왕인가?]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사기에서 그 시대를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묘사하는 내용은 그 시대 사람들이 그 질문에 답을 한 것이 됩니다. 이것처럼 함께 읽는 사무엘서의 핵심 질문은 [누가 참된 예배자인가?]입니다. 이어지는 사무엘의 내용들을 읽으실 때, 이 질문에 답을 구하시며 읽으면 사무엘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좀 더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가나의 가족이 예배(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 일어난 내용을 보여줍니다. 엘가나와 한나, 그리고 브닌나는 함께 성소에 올라가 예배했습니다. 분명 이들은 성소에 올라갈 때, 옷차림도 행동도 깔끔하고 바르게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하는 동안 더 반듯하게 예배하고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모습은 그들을 보는 다른 이들에게는 이들의 인품처럼 비춰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도 내가 이런 사람은 된다고 착각하게 만들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소가, 그리고 예배가 우리들의 성품을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없는 성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예배와 성소는 우리가 가진 성품을 극대화해서, 그 성품들이 최대한 잘 드러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엘가나의 가족도 그랬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난 후, 엘가나는 연약한 한나를 더 배려해주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성품이 어떠한지 드러냅니다. 그런가하면 브닌나는 예배를 마치면(물론 본인은 남편 엘가나의 편파적인 행동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 있겠지만) 연약한 한나를 격분케하여 괴롭히는 행위로 자신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6절과 7절에서 격분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며 그것이 브닌나에게는 항상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분명 함께 예배하고 나왔지만, 함께 성소 가까이에 머물러 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사람들의 성품이 선한 성품으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더 선하게, 악한 사람은 더 악하게 그 성품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나와 같이 성격이 안좋은 사람은 이런 나의 나쁜 성품이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예배를 왜? 드려야 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한나가 알게 해 줍니다. 한나는 예배를 드리고 나면 그 마음이 격동하게 되어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졌습니다. 어쩌면 예배가 한나에게는 열등감을 더 크게 보이도록 하고, 그 마음에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 더 끓어오르도록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나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내면을 사람들에게 말하며 동정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것이 예배가 갖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나와 같은 이에게도 예배가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배를 통해 나를 분명하게 확인하고서 [나는 원래 그래]로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의 모습을 하나님께 꺼내어 놓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내 가식과 위선에 가려져 나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나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더럽고 추악한 성품을 확인하고서, 그런 모습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배를 생각하면 웅장한 건축물, 단정한 사람들, 조화로운 진행, 아름다운 찬양, 경건한 기도, 은혜로운 말씀과 같은 것들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는 그런 우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사람들에게 그런 우아한 예배를 원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분이셨다면, 하나님은 예배자의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거나 천사들만 예배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는 그런 우아함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드려진 - 역겨운 피냄새 가득했을 제사를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역겨운 피 냄새 속에서 드려진 제물의 연기를 가리켜 하나님께 드려지 향기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심령은 우아한 것이 아니라 처절한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도 부끄러운 내 모습에, 결국 하나님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하나님이 멸시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쁘게 흠향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는데 마음에 나쁜 생각이 남아있어 불편하시다면, 예배를 드리는데도 착한 마음이 품어지지 않아 어렵다면, 예배의 자리에 서면 힘들었던 무엇인가가 생각나신다면… 참으로 올바른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것이 맞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그 마음을 하나님께 꺼내어 놓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에 대한 슬픔으로 눈물 흘리며 탄식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나의 상한 마음을 기쁘게 받아주시고, 정결한 마음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이런 예배되는 은혜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예배를 드리며 깨닫게 나의 악하고 연약하고 부족함이 나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믿음의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런 나의 마음을 싸매주시고 치유하여 주시는 은혜가 가득한 예배를 항상 드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