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er than Honey | 말씀곱씹기 단맛이 날 때까지/사사기(~ing) |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입니다.

사사기 4장 1-9절

Apis 2024. 5. 22. 22:30

1-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끊임없이 악을 행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훗이 죽은 뒤에 하솔에서 다스리던 가나안 왕 야빈에게 그들을 팔아 버리셨다. 그의 군대 사령관은 하로셋학고임에 사는 시스라였다. 그가 구백 대의 철제 전차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잔혹하게 압제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4-5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는 예언자요, 당시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사사였다. 드보라가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와 베델 사이에 있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서 재판을 열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녀에게 가서 재판을 받곤 했다.
6-7 드보라가 납달리의 게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다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다볼 산으로 가서 전투를 준비하여라.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중에서 군사 열 개 부대를 이끌고 가거라. 내가 야빈의 군지도자 시스라를 그의 모든 전차와 군대와 함께 기손 강가로 끌어들이겠다. 내가 반드시 너를 도와 전투에서 이기게 하겠다.’”
8 바락이 말했다.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나도 가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나도 가지 않겠습니다.”
9-10 드보라가 말했다. “물론 나도 그대와 함께 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세로는 이 일에서 그대가 영광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여인의 손을 빌어 시스라를 처치하실 것입니다.” 드보라는 준비를 마치고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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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문화유적, 하솔

2005년 유네스코는 이스라엘의 유적지들 가운데 므깃도, 브엘세바, 하솔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했습니다. 그 중 하솔은 북부 갈릴리 지역의 유적지 중 가장 큰 유적지입니다. 하솔은 이미 주전 18세기 이전부터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이것은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하솔은 가나안의 주요 도시였고, 가나안 북부지역의 중심이 되었던 곳입니다. 또한 이집트에서 발견된 주전 14세기의 문서에 의하면 당시 하솔은  가나안의 주요 왕으로서 이집트에 충성을 바쳤다고 묘사됩니다. 가나안 북부의 하솔이 간안을 지나 이집트도 관심을 가질만한 도시였고 어떤 관계이든 이집트와도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 의해 하솔이 정복당하기 전 가나안에서 하솔이 가졌다 위치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진멸했지만 다시 재건한 하솔

그러던 하솔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진멸당하게 됩니다. 성경은 여호수아와 싸운 가나안 북방의 왕들 중 하솔은 본래 그 모든 나라의 머리였다(수 10:1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중남부 지역이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하솔 왕 야빈은 자신의 영향아래 있는 지중해에서 요단에 이르는 가나안의 북부 전 지역에서 군대를 불러 모읍니다. 백성이 많아 해변의 수많은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셔서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은 하솔 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였고, 그 성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진멸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 살아남은 하솔의 일족은 재기하게 됩니다. 하솔 성은 여호수아 시대에 불타 없어졌고, 그 영향력은 예전 같지 못했지만 하솔 일족은 강력한 무기인 철병거를 손에 넣음으로 재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철병거 900대로 이루어진 막강한 군대를 꾸리게 되고 가나안 북부 지역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또다시 범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솔의 손에 넘기십니다. 이전의 원한이 쌓여있던 하솔은 이스라엘을 충분히 힘들게 했습니다. 이전의 원한이 있어 더 심하게도 했겠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의 거점이 가나안 북부 산지 고원으로 이스라엘과 겹쳤기 때문입니다. 

 

하솔의 학대 아래서

이스라엘은 하솔의 20년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이 때 이스라엘의 사사는 여 선지자인  드보라였습니다. 드보라는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판결하며 사사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인 드보라가 전쟁에 앞장서서 이스라엘을 이끌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바락을 세워 전쟁을 이끌게 하십니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사람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시스라의 군대와 맞서 싸우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받은 바락은 드보라에게 그 전장에 같이 나가 줄 것을 요구합니다. 드보라가 같이 가면 가겠지만 드보라가 가지 않으면 자신도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것을 어떻게 해석할지 여러 의견이 나오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은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드보라의 말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하지만 그런 자세로는 이 일에서 그대가 영광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찌질한(?) 바락, 안타까운 바락 

말씀을 통해 이런 상황을 보면서 바락의 찌질함이 답답해 보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변변한 무기도 없이 강력한 철병거와 맞서야 되는 상황 속에서 더 믿음이 좋아 보이는 (= 자신보다는 하나님과 가까워 보이는) 드보라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문제가 되나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오늘 말씀에 나를 비춰보면 나는 드보라보다는 바락과 좀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 없음을 도우셔서 연약한 믿음에 힘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혼자서 안될 것 같은 상황들을 만날 때, 더 큰 믿음의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은 나름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았는데, 그런 나에게 오늘 본문은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이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살다가 천국에 가서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께 책망만 듣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생깁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나에게 부담만 주시고, 마음을 무겁게 만드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그런데 왜 바락에게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락을 보시며 기대하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런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도우시는 분이시지, 결코 이런 것들을 이유삼아 내게 씻겨지지 않을 부끄러움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락도 그렇게 나간 전쟁이었지만, 전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시스라의 본거지까지 쫓아가 그 군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이런 바락의 전공 덕분에 이스라엘은 점차 하솔왕 야빈을 눌러 멸망시키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점점 더 강력하게 가나안 왕 야빈을 억압하였고,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멸망시켰다(사사기 4장 24정, 새번역).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바락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는 이 바락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바락을 어떻게 평가하시고, 어떻게 기억해 주실까요?  히브리서 11장 32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바락의 이름에는 여인 뒤에 숨었던 찌질함도, 혼자 갈 수 없다던 연약함도 표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드온과 사무엘과 다윗 같은 이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그 이름을 끼워 넣은 믿음의 영웅 중 한 사람으로 바락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주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부끄러움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좋았던 믿음의 순간들 만으로 하나님의 기억을 채워가십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잘못을 책망하시려고 준비하시는 분이 아니라 허물을 덮으시고 칭찬해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 은혜를 기대하고 소망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도 이 모습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심을 믿고 기대한다면, 나도 삶의 자리에서 내 곁에 있는 이들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관용을 연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진달래의 1년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사는 시간보다 

아름다움을 잃고 사는 날들이 더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달래의 초라한 모습보다는 

연분홍빛 화사한 진달래를 더 기억한다. 

 

꽃을 피운 날들이 얼마 되지 않지만 

사람들은 지극히 짧은 이 날의 모습을 진달래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1년을 거의 채우는 볼품없는 진달래를  

진달래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진달래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는 우리의 삶과 대비해 본다. 

많은 이들이 꽃을 생각할 때엔 아름다운 때 만을 기억해 주면서, 

사람들을 생각할 때엔 아름다웠던 순간을 기억하기보다 

불편했던 모습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 금년에도 고갯길에 활짝 꽃망울을 터뜨린 진달래를 보면서 

나와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활짝 핀 진달래꽃을 보고 진달래를 이야기하듯, 

그들의 아름답고 소중한 장점을 기억하고 품어주는 

너그러움과 넉넉함이 필요했다는 반성을 해본다. 

 

더구나 꽃보다 귀하고 꽃보다 아름다운 게 사람일진대 말이다. 

 

[홍문택 신부, 오늘은 잔칫날이었습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