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루는 다윗이 물었다. “사울의 집안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느냐? 만일 있다면, 내가 요나단을 생각해서 그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구나.”
2 마침 시바라는 사울 집안의 종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다윗 앞으로 불러오자, 왕이 물었다. “네가 시바냐?” “예, 그렇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3 왕이 물었다. “사울의 집안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에게 하나님의 친절을 베풀고 싶구나.” 시바가 왕에게 말했다. “요나단의 아들이 있는데, 두 다리를 모두 접니다.”
4 “그가 어디 있느냐?” “로드발에 있는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5 다윗 왕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에 있는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왔다.
6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다윗 앞에 와서 엎드려 절하고 자신을 낮추며 예를 갖추었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대가 므비보셋인가?” “예, 왕이시여.”
7 “두려워하지 마라.” 다윗이 말했다. “내가 네 아버지 요나단을 기억하여 뭔가 특별한 일을 네게 해주고 싶구나. 우선 네 할아버지 사울의 재산을 모두 너에게 돌려주겠다. 그뿐 아니라 이제부터 너는 항상 내 식탁에서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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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비보셋
므비보셋은 사울 왕조 시절에 왕궁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요나단 왕자였고, 할아버지는 왕좌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사울 왕이었습니다. 요새 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므비보셋의 인생에 문제가 찾아온 것은 한창 재롱을 부리고 즐거워야 할 5살 때였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 중에 그의 할아버지인 사울과 그의 아버지 요나단이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인들은 왕궁을 완전히 유린했습니다. 그때 그것을 피해 도망치다가 유모가 그를 떨어트려서,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므비보셋은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누리던 모든 혜택을 잃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평생 숨어 살아야 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죽은 다음에도 열지파는 아브넬의 주도하에 사울의 아들 중 이스보셋을 중심으로 나라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므비보셋은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로 왕위 계승자였지만, 두 다리를 절게 된 현실은 왕이 될 수 없게 했습니다. 이런 자신을 과연 그의 숙부가, 또 당시 실력자인 아브넬이 반겨줄 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다윗이 결국 왕국을 통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사울의 후손인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그저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이 살던 곳은 ‘로드발’이라고 나옵니다. ‘로’는 히브리어로 ‘아니다’라는 부정사이고 ‘드발’은 목초지를 의미합니다. 므비보셋은 지금 목초지가 아닌 곳, 다시말해서 황무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는 므비보셋이지만 사실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또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태어나서는 왕궁에서 축복가운데 살았지만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고 장애를 얻고 숨어사는, 그는 단지 역사의 희생자이고 운명의 희생자였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다
그런 므비보셋에게 어느 날 다윗 왕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다윗 왕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에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아마 몸이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새 왕조가 집권을 하면 이전 왕족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거나 아니면 감금해 두었습니다. 반역의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이 보낸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므비보셋도 다윗이 사울의 자손인 자신을 살려 둘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므비보셋이 다윗 왕 앞에 섰습니다. 운명의 만남이 이뤄진 것입니다. 다윗 왕이 므비보셋을 바라보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습니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입을 열어 건넨 첫마디 말은 그 어떤 명령이나 선포가 아니라, 므비보셋이라는 자신의 이름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상황 속에서 살아왔던 므비보셋은 두 다리에 장애가 있는 그를 주변에서는 조롱하고 빈정거리며 불렀을 것입니다. 왕궁을 떠나고서 므비보셋 자신의 이름으로 온전히 불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의 이름을 다윗이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아버지 요나단을 생각해 네게 은총을 베풀고 네 할아버지 사울에게 속했던 모든 땅을 네게 돌려줄 것이다. 그리고 너는 항상 내 식탁에서 먹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감동을 넘어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그저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해를 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상황입니다. 아니 생활비만 조금씩 지급해 주더라도 대단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므비보세에게 그것을 넘어 이전의 축복을 누리던 시절의 삶을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사울의 전 재산을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자녀들과 함께 왕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특권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다시금 므비보셋의 인생에 반전이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왜? 이런 파격을 베풀고 있는 것 일까요? 1절을 보면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라고 다윗이 말합니다. 이 일의 처음 시작은 다윗이 요나단을 기억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이 요나단의 자녀만 찾았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그의 신하들에게 그리고 찾아낸 사울의 종 시바에게 묻습니다.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다윗에게 사울은 원수 같은 존재이지만, 그의 아들 요나단은 친구이며 은인입니다. 이제 왕이 된 다윗은 사울의 집안을 보며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원한을 따라 복수의 길을 갈지, 요나단의 은혜를 따라 보답의 길을 갈지… 그리고 다윗은 선택했습니다. 은총을 베풀기로 … 요나단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사울의 집안에 은총을 베풀기로 먼저 결정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대상으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선택된 것입니다.
믿음 안에 살아가면서 참 힘든 일이 과거의 감정을 정리하고, 상처 주었던 이들을 용서하고 품는 일 같습니다. 분명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리면 누구라도 용서할 것 같지만, 정작 그 사람의 얼굴을 대하고, 목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그런 마음은 증발되어 날아가 버리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결국 믿음으로 이겨내고 사랑으로 품어가지만, 그러기까지 힘들어했던 모습들은 종종 말씀 속에서도 보입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도 애굽에서 형들을 만났을 때, 3번씩이나 눈물을 쏟아내고서야 형들로 인한 상처를 털어버리고 나를 이곳에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어떻게 그런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사울의 집안에 은총을 베풀수 있었을까요? 3절에서 다윗은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라고 말합니다. 1절에서 은총을 베푼다는 말이 좀 더 구체화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힘으로 그를 감싸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를 감싸 안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나단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 은총을 나누겠다는 것입니다. 그 은총이 자신을 통해 흐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있음을 인정했으니 … 이전의 그 일들도 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 진행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연장
다윗은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펼쳐져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총도 자신을 통해 흘러야 된다는 것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낼 때, 공적인 영역에서 정의와 공평을 나타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나를 통해 흘러갈 때, 나의 개인적인 영역, 감정적인 부분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을 향해 보복이 아닌 은총을 베푸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통해서도 이 은혜가 흘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어쩌면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불편한 자리로 내몰았던 그 사랑일 수 있습니다. 힘겹지만 나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사랑을 흘러 보낼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아픔에 사로잡혀 지나간 분노에 나를 내어 맡길 것인지를... 이 시간 십자가의 은혜가 다시금 내 마음 깊은 곳을 만지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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