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음 해 암몬 사람이 침략해 오는 시기가 다시 돌아오자, 다윗은 그들을 아주 멸하려고 요압과 이스라엘의 용사들을 모두 출정시켰다. 그들은 랍바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2-5 어느 느지막한 오후, 다윗이 낮잠을 자고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고 있었다. 시야가 트인 옥상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에 대해 알아보게 했더니, 그가 “이 사람은 엘리암의 딸이자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입니다”라고 보고했다. 다윗은 부하들을 보내 여인을 데려오게 했다. 밧세바가 도착하자 다윗은 그 여인과 동침했다(이 일은 그녀의 월경 이후 ‘정결예식’ 기간 중에 일어났다). 밧세바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여인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나중에 그 여인은 “제가 임신했습니다” 하고 다윗에게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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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을 떠올릴 때 함께 생각나는 이들들이 있습니다. 먼저 떠오르는 순서대로 이름을 나열하면, 골리앗이 가장 앞에 나오고 바로 그 다음에 밧세바가 나올 것입니다. 골리앗은 다윗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었다면, 밧세바는 다윗이 죄 앞에 무력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죄를 유혹과 연결시키지만, 다윗의 범죄에는 그 어떤 유혹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밧세바가 누군가 보기를 기대하며 그곳에서 목욕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왕궁 옥상에 올라가면 주변에 있는 일반 주택 마당이 내려다보일 만큼 왕궁의 옥상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과 밧세바 사건에서 유혹을 떠올리는 것은 그렇지 않고서는 다윗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너무 좋았습니다.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만큼 다윗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죄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무너진 이유를 분명하게 찾을 수 없다면, 다윗이 죄 앞에서 무력한 것 이상으로 나도 죄앞에서 무력하게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넘어진 이유가 필요합니다. 다윗 같은 이마저도 넘어지는 강력한 유혹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밧세바는 팜므파탈처럼 묘사되었습니다. 수많은 그림 속에 나타난 밧세바는 누구가를 유혹하는 눈빛과 자태로 자신의 몸을 닦고 있습니다. 자신을 부르는 다윗의 부름(=편지)에 홍조를 띠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단 한 차례도 밧세바를 향하여 네가 죄를 지었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사건 속에서 밧세바가 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사건 속 범죄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이 다윗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무너졌을까요?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무엇이 다윗을 무너뜨린 것일까요?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이 이유가 절실하게 필요해서 더러는 다윗의 낮잠을 이유로 꼽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낮잠은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낮잠은 무더운 근동지역의 문화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좋던 다윗도 죄앞에서 무력하게 넘어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스스론 죄와 맞서 이겨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연약한 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내 안에 함께하시는 성령 하나님으로 나와 동행하신 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윗이 멋있고 믿음이 좋아 보여도 홀로 선 다윗보다,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내가 죄에 대해 강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 함께하는 나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무너진 이유를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유혹이나 낮잠 같은 것들이 아니라 일상의 언어를 통해 탁월하게 풀어내셨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보내다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 보내다라는 단어가 계속 등장하는데 이 단어가 다시 등장할 때마다 사건들이 걷잡을 수 없게 커져갔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보내다라는 단어의 반복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단을 보내신 것으로 끝맺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내다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입니다. 착하게도 나쁘게도 사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데 이렇게 가치중립적인 보내다 이지만 이런 행위를 아무런 생각이난 반성 없이 반복하게 되면, 그 끝에는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보내다에 담겨있던 것이 아니라 생각없이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무서운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생의 순간순간을 깊이 생각하며 살지 않는 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수하게 되고 결국 나쁜 결말로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치중립적인 행동이라도 생각과 반성 없이 무의미하게 반복하면 그 끝에는 파국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을까요? 별것아닌 멍 때림으로, 무의미하게 쏟아내는 말들로, 바보상자 앞에서 정신 줄을 놓아버린 채로 무엇인가 반복하는 내 모습이 있다면 여기서 멈추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 무의미한 삶의 바퀴가 더 크고 파괴적으로 달라지기 전에... 오늘도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생각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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