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er than Honey | 말씀곱씹기 단맛이 날 때까지/사무엘상 [새 시대를 여는 사람]

사무엘상 4장 12-22절

Apis 2022. 12. 17. 08:00

12-16 곧바로 베냐민 사람 하나가 전쟁터에서 빠져나와 실로에 이르렀다. 웃옷은 찢어지고 얼굴은 흙투성이가 된 채로 그가 성읍에 들어섰다. 엘리는 하나님의 궤가 몹시 걱정이 되어서 길 옆 의자에 앉아 꼼짝 않고 있었다. 그 사람이 곧장 성읍으로 달려와 슬픈 소식을 전하자, 모두가 슬피 울며 크게 두려워했다. 엘리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물었다.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가?” 그 사람이 급히 다가와서 보고했다. 엘리는 그때 아흔여덟이었고 앞을 보지 못했다.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했다. “제가 방금 전쟁터에서 왔는데,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엘리가 말했다. “그래 내 아들아, 어떻게 되었느냐?”

17 그 사람이 대답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참패입니다. 제사장님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사했고, 하나님의 궤도 빼앗겼습니다.”

18 ‘하나님의 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엘리는 앉아 있던 문 옆의 의자에서 뒤로 넘어졌다. 노인인 데다 아주 뚱뚱했던 엘리는,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는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다.

19-20 엘리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임신한 아내가 곧 해산하려던 참이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시아버지와 남편마저 죽었다는 말을 들은 뒤에, 그녀는 아이를 낳기 위해 무릎을 구부린 채 심한 진통에 들어갔다. 산모가 죽어 가는데, 산파가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산모는 그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21-22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으므로, 그녀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하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사라졌다)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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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 vs 나의 영광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졌습니다. 무려 3만에 달하는 군사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에 빼앗겼고, 언약궤 곁의 두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쳤습니다. 이 소식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전해졌고, 실로의 성소에서도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때 대제사장 엘리는 성소 앞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엘리는 두 아들이 죽고,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놀라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엘리가 그런 사고가 일어난 이유가 엘리의 몸이 뚱뚱해서라고 아주 이례적으로 엘리의 체형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긍정적인 느낌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엘리가 사사로 40년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사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아마 사람들이 판결이 필요한 경우 엘리애게 나와서 판결을 받았을 것입니다. 즉 엘리는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 지도자이었고, 사법적인 부분까지도 담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는 하나님과 교제도 없었고, 하나님께 말씀을 따로 받지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엘리가 이끌던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오직 엘리의 판단력에 따라 모든 문제들의 시비를 가렸습니다. 영적인 부분에서는 엘리의 판단력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습니다. 하지만 말씀에 드러난 엘리는 판단력이 그렇게 좋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엘리가 뚱뚱하였다는 표현은 엘리의 판단력이 예리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전하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모두가 예리하고 좋은 판단력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는 판단력도 별로였지만,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좋은 판단력을 가진 지도자보다는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지도자가 이스라엘에는 더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될 때, 비느하스의 아내는 출산을 위해 산통중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이 안 좋은 소식이 들려졌습니다. 이 여인은 난산으로 죽어가며,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제사장인 남편과 대제사장인 시아버지가 죽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비극적인 상황이지만 조금 냉정하게 보면, 이 여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이 집안의 불행과 함께, 언약궤와 함께 떠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시비를 오직 엘리 자신의 판단 만으로 결정하던 4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도 없습니다. 언약궤를 옆에 모시고 하나님의 제사를 진행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게 살아가던 엘리 집안을 통해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엘리 집안의 [풍요로움]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즉 이 여인은 그리고 엘리의 가족들은 이제껏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들의 풍요로움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그 모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가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궤는 홀로 블레셋에 가셔서, 그들을 꺾으시고 영광을 누리고 돌아오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영광을 누리기 위해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홀로 영광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영광을 위한 자리로 나를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기쁨이고, 유익이고,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편지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살고 있던 바울에게는 무엇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는 오직 한가지 목표 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만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의 소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울 사도처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입니다. 이렇게 내가 모든 삶을 예수와 함께 살게 되면, 나에게도 [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하고자 하는 꿈을 품을 있게 것입니다. 이런 삶을 게속해서 살아가면, 삶과 죽음의 문제조차도 흔들지 못하는 평강과 담대함이 나를 가득 채우게 것입니다. 이런 삶을 맛보는 귀한 은혜가 경험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