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보아스는 룻과 결혼했고,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 보아스가 룻과 잠자리를 같이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룻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14-15 성읍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께서 그대를, 생명을 이어 갈 가족이 없는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이스라엘에서 유명해지기를 빕니다! 이 아이가 그대를 다시 젊어지게 하고, 노년의 그대를 돌볼 것입니다! 이 아이의 어머니이자 그대를 이토록 사랑하는 이 며느리는, 그대에게 일곱 아들보다 귀합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꼭 껴안고, 다정히 속삭이며,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17 여인들은 그 아이를 ‘나오미의 아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이름은 오벳이었다.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였고, 다윗의 할아버지였다.
18-22 베레스의 족보는 이러하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
하나님이 관심 갖으시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
얼마 전 이런저런 문제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분을 만났습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하나님 앞에 결심한 일들이 있는데, 삶의 무게에 눌려 일상의 일들에 밀려 그 일들이 쉽게 진행되지 않음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힘들어하는 내용 중에 상당부분이 주변에서 그분의 결심을 들었던 분들이 왜 믿음 없이 그런 선택을 하느냐고 말하는 것들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비교적 자세히 그분이 살아온 삶의 궤적들을 지켜 보았기에 쉽게 말을 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분은 고민을 털어놓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만난 것이어서, 부족하고 덜 여문 생각이지만 평소에 품고 있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우리의 호흡보다 더 깊고 느리다고… 조바심에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결정하려고 하는 나와는 다르게 하나님은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지켜보신다고, 지금 당장 이루어 내는 무엇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
나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지금 알고 싶어합니다. 아니 정확한 표현은 지금 그것을 잘 알지 못해 어려워 합니다. 지금 나에게 당한 이 일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면 마음이 조금 편할 것 같은데, 그것만 알면 그래도 견뎌낼 것 같은데 아무 이유를 모를 사건과 문제 앞에서 힘들고 지쳐가고 있습니다.
나오미도 그랬을 것입니다. 모압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을 잃고, 두 아들이 죽었을 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기에, 아무 희망없는 절망에 발딛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오미는 자신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1장 20-21절,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는 자신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보며 스스로 결론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내 손을 비우셨고,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신다. 이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 지금 일어난 일들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지 않으시는데, 스스로 모든 일을 판단하여 알아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내린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게 닥친 이 문제는 하나님의 징벌이고 하나님이 내린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내 문제를 넘어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은 이런 죄를 지어서 저런 일을 겪는 것이라고, 저 사람에게 그런 상황이 닥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풀어야 할 무엇이 있는것 아니겠냐고… 예수님과 함께 걷던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부모 때문입니까? 이 질문에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죄의 결과라는 전제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제 위에서 묻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 (너희는) 탓할 사람을 찾으려고 하니 (그렇게 묻고 있구나), 너희의 질문이 잘못되었다. 이 일에 그런 식의 인과관계는 없다. 차라리 너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주목해 보아라.
잘못된 일을 보면 자꾸 그 원인을 내 안에서, 또 누군가 안에서 찾으려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합리적이고 신앙적인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생각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우너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내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해 먼저 결론내리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룻기를 묵상하다가 새삼 발견한 것은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나오미에게 그 어떤 말씀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절망가운데서 스스로 징벌을 받는다고 괴로워했던 것이지, 하나님은 나오미에게 징벌을 선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이 나오미의 상황이 어렵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오미는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나는 헤아릴 수 도 없을 만큼 극심하게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지나는 나오미를 향해 하나님은 그 죄를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이라는 생각은 순전히 나오미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라고 해석하는 순간, 나오미의 삶에는 어떤 피난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런 것 아닙니까? 그렇게 보인 것입니다. 나오미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만약 나오미가 아픔과 고난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스스로 그런 해석을 내리지 않았다면 나오미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꺼내어 놓으며 하나님의 판단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징계하시더라도 어루만져 주시는, 그 상처를 싸매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누렸을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다, 그리고 시간의 제약을 받다
믿음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라고 쉽게 고백하지만, 정작 그 고백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월한다는 것은 구애받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아무런 장애요소, 불편함, 제약받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어떤 일을 진행하실 때 시간때문에 못하시는 일들이 없으시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이라는 문제가 하나님께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처럼 바빠서 못하시고, 때를 놓쳐서 못하실 일이 없으시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에 갇혀서 못보시는 것이 없으시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의 제약아래 살고있습니다. 시간 속에 갇혀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의미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하는 일들에 대해 이것이 어떤의미를 가지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려고 이렇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내가 시간을 조금 초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간을 조금 벗어나서 사건들을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가까운 시점보다는 좀 더 멀어지면 보다 더 시간을 넘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나간 그 일들을 돌이켜 보면, 그 때는 왜이러시는지 이해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손길이 나의 눈에 조금 다르게 보여집니다. 그 때는 해석할 수 없었던 사건의 의미들이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르게 해석되는 인생
나오미가 그렇습니다. 아픔 가운데 절망가운데 해석되지 않는 문제들을 붙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이 징벌하셨다던 나오미가 지금 웃고 있습니다. 그 품에 오벳을 안아들고서, 오벳의 양육자가 되어 웃고있습니다. 아마 이 시점에서 나오미는 자신에게 당한 일들이 조금 다르게 이해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믿음 안에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룻기를 기록한 룻기 기자는 다윗시대 이후에 이 책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18절부터 이어지는 족보에는 다윗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룻기의 기자는 나오미보다 나오미의 인생 속에 일어난 사건들 속에서 보다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당한 고난이 단지 나오미가 오벳을 안고 양육자가 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알 았을 것 입니다. 그는 나오미에게 당한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준비하시려고 진행하신 일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적어도 나오미의 일이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여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읽는 나는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삶을 통해 룻기의 기자가 본 의미들 너머로,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님을 준비하시는 놀라운 구원 계획이 진행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당한 아픔과 고난의 시간 안에는 온 세상과 인생들을 향하신 새롭고 놀라운 구원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시간 속에 갇혀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통에 찬 탄식을 쏟아냈고, 절망과 아픔이 담긴 독설을 쏟아냈습니다. 나오미가 불과 1-2년 뒤를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 고통의 탄식은 조금 달라졌을 것입니다. 나오미가 100여년 정도를 내다보며 생각할 수 있었다면, 나오미는 고통의 시간을 기대를 가지고 잠잠히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처럼 온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알았더라면 나오미는 오히려 기뻐 찬양하였을 것 입니다.
새옹지마
잘 알려진 고사성어 중에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변방 노인의 말(馬)'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의 북쪽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노인이 기르던 말이 어느 날에 도망가자 사람들은 "말이 도망가서 어쩌나..." 하고 위로 했지만 이 노인은 "글쎄요, 이 일이 복이 될 지 어찌 알겠소."라며 낙심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얼마 뒤에 도망갔던 말이 많은 야생마들을 이끌고 노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부자가 되셨구려, 그 말이 복덩이였네요."라고 축하했지만 이 노인은 "글쎄요, 이 일이 재앙이 될 지도 모르지요."라며 기뻐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아들이 그 말들 가운데에서 좋은 말 하나를 골라 타고 다니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치고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들이 다쳐서 저 지경이 되었으니 어쩌나..." 하고 걱정하며 위로했지만 노인은 "글쎄요. 이게 복이 될 지 어찌 알겠습니까."라며 덤덤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런 노인을 사람들은 아무래도 실성한 것 같다며 멀리했습니다. 몇년 뒤, 북방의 오랑캐들이 쳐들어와 많은 남자들이 징집되어 전쟁에 끌려갔습니다.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절었기에 징집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끌려간 남자 대부분이 전장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오직 그 노인의 아들만 다리는 절었지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노인이 왜 그리 모든 일에 덤덤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후세 사람이 이를 기억하여 시를 지으면서 '새옹지마'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인생의 앞에 다가올 화와 복을 알 수 없으니, 매사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들 조차 인생이 시간안에 갇혀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존재라는 인정하, 인생이란 일희일비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찾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함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해,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 무리해서 결론지으면 나오미처럼 잘못된 답을 찾게 됩니다. 겸손히 알지 못함을 인정하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랄 때, 내 인생의 사건과 문제들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로 나를 채워야 내 문제 뿐만아니라 타인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섣부른 정답을 말하려는 나의 교만하고 경솔한 마음에 고삐가 채워지게 됩니다. 겸손하게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게 될 때에, 비로소 누군가의 문제를 판단하려고 하기보다는 기도와 사랑으로 포용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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