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er than Honey | 말씀곱씹기 단맛이 날 때까지/사무엘하(~ing) |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사무엘하 1장 17-27절

Apis 2024. 4. 11. 22:30

하나님의 마음으로

쉽게 사용하면서 살아내기 어려운 말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 한 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라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들을, 형제자매들을 대하고, 내 삶의 문제들을 보기 원한다고 기도하지만…. 어려운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내 안에 품고 사는 것 같습니다. 말씀 보고 기도하며 몇 번씩 다짐하고 일어났는데, 상황 속에서… 문제 앞에서… 그 사람만 보면 다시금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반응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일으키시는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 아닌

그렇게 살라는 권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바울사도는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 에수의 마음을 갖기를 소망하며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바람이 아니라 가능한 것에 대한 권면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우리의 기대

다윗의 반응 다윗이 우리에게 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그 끝이 사울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하권이 시작되면 우리는 다윗이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이야기를 기대하는데 우리의 기대와는 조금 다르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는 사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옷을 찢고, 금식하며, 애가를 부르는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를 이런 식으로 만들면 너무 늘어져서 시청률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의 호흡을 따르면 주인공 다윗을 힘겹게 하던 사울이 죽고, 이제 찬란한 다윗의 시대가 열려서 그동안 드러내지 못했던 다윗의 능력들을 마구마구 펼쳐내야 됩니다. 그래야 시청율도 좀 올라가고요… 우리 마음도 통쾌해지지 않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지 않습니다. 아니 다윗이 그렇게 반응하지 않고, 현실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시대가 달라서 그런 걸까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면 사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고 왔던 아말렉사람이 사울의 죽음을 꾸며내서 이야기하며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을 보면, 그 시대에도 우리시대의 드라마가 통했을 것 같습니다. 


사울의 죽음 = 슬픈 소식

아말렉 사람은 자신이 사울을 죽이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다윗에게 달려왔다고 말을 하는데, 다윗은 그 소식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가져온 사울의 왕관을 쓰고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그 일이 이제 이루어졌다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울의 죽음 앞에서 옷을 찢고 금식하며 애가를 지어 부릅니다. 분명 사울은 다윗을 힘들게 하던 존재였습니다. 사울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에 머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나발 같은 이들의 조롱을 당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영웅에 걸맞게 사람들의 환호를 들으며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울이 죽었지만, 다윗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주권자의 죽음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이 많이 죽어간 사건입니다. 사울과의 개인적인 감정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도대체 다윗은 어떻게 그 과거의 상처들을 넘어서 반응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 지금 상황 속에서 자기가 누릴 유익이 무엇인지 왜 따져보고 계산하지 않을까요?


시글락에서 이틀 

사무엘하 1장 1절에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라고 되어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가 회복하고 돌아온 지 이틀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불탔던 시글락은 아직도 온전히 정리되지 못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 모습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힘과 능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과 형편들을, 역사와 사건들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심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사울도 한 역할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향하여 나를 애굽에 보낸 이는 하나님이시라 했던 고백처럼, 다윗도 내 인생에 많은 부분을 사울이 끼어들어 어려움을 주었지만 은혜 안에서 그 모든 일의 처음과 끝에 하나님이 서 계셨고 이끌어 오셨다는 인정하고 바라보니 … 다른 것보다 우선하여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스라엘의 왕-사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슬픔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누구를 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무한한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대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도 은혜가 아니면 결코 살 수 없고, 내가 힘들어하는  바로 그 존재와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안에 있는 어떤 판단이나 감정적인 찌꺼기를 버리고 내 주변을 바라보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리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겸손하게 자기를 비우신 그 마음을 가지고 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과 비움 삶의 자리에서

그렇게 살기 쉽지는 않지만,  내 삶이 나의 힘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로 지탱되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면, 내 인생의 처음과 끝에 하나님이 서 계시며 내 인생을 주관하고 계심을 인정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만남과 상황들이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뜻가운데 예비된 일이기에 나의 감정의 반응보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생각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모습은 언제난 겸손으로 드러나며, 나의 주관과 의지를 비워가는 모습으로 표현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삶을 붙드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인정하였을 때, 사울의 죽음이 안타깝고 슬픈 일로 그에게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사울에 대한 다른 감정들을 넘어 사울을 그저 애통함으로 품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삶 가운데 과거의 쓴 뿌리로 인하여 품어지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면, 용서되지 않는 상황들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내 감정으로 되지 않을 그 사람이, 그 문제가 품어지고 용서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