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5. 친구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방문하지 못한 것을 두고 부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로마에 가려는 계획을 얼마나 자주 세웠는지 아마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다른 많은 이방 성읍과 공동체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늘 사정이 생겨 그러지 못 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문명인이든 미개인이든, 학식이 많은 사람이든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이며,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존재인지를 깊이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내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 어서 가서 하나님의 놀랍도록 복된 소식을 전하려는 이유입니다.
16-17. 내가 참으로 자랑스럽게 선포하는 이 소식은, 그분의 능력 가득한 게획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 구원하신다는 엄청난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을 바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의 길은 믿음의 행위 안에서 드러납니다. 이는 성경이 늘 말해 온 것과도 일치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진 사람은 참으로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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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로마를 방문하려고 하는 것은 피차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나누는 것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여러 번 여러분에게 갈 계획을 세웠으니 ... 다른 이방인들 사이에서 믿는 자들을 얻은 것처럼, 여러분 중에서도 어떤 열매를 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13절).
열매를 얻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과 거두는 것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은 내적인 부분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 ‘안에서’ 열매를 얻기 원했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이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열매를 맺게합니다.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결실을 하게하는 능력이 복음의 말씀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을 믿는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안에서 열매를 얻고 싶었습니다. 또 열매를 거두는 것은 외적인 부분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동안 자신의 사역을 통해 열매를 거두었던 것처럼, 로마 교회 ‘밖에서’ 열매를 거두기 원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말씀하셨듯이,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가 전도의 자리에 적극 나서도록 격려하고 함께 전도하기 위해서 로마로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열매를 얻고 거두는 일에 대하여 일반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스스로를 가리켜 헬라인이든 헬라인이 아니든, 지혜롭든 어리석든, 종족적 배경이나 지적 수준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빚진이라는 말은 갚을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울 사도는 로마를 방문한 적도 없었고, 로마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어떻게 로마에 있는 이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마치 누군가 나에게 100달러를 주면서 B라는 사람에게 전해 주라고 했다면, 나는 그것을 건네주기까지 B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갚을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사도에게 복음을 알게하셨고,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선포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바울 사도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복음을 빚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의 열매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신이 빚진 태도로 받아들이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화려한 예배당과 높은 첨탑 위의 십자가가 익숙한 우리에게 이 말씀은 크게 와닿지 않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우리시대에는 누구도 복음을 부끄러워 해야 할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항상 복음을 전하려 열망하기보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며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언가 내가 내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실패자라는 느낌을 담고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이 부분을 지적하며 기독교를 패배자의 종교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인생의 실패자로 취급했습니다.
실제로 복음은 내 인생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기초 위에서 역사합니다. 이런 복음의 특성 때문에 자신을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상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불편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내 죄가 사함을 얻었고 그 결과 이제 내가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일을 책임지고 바르게 살려고하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또 복음은 그 어떤 선한 행동이나 선한 업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만 구원이 허락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보편 타당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사람들과 인과론에 묶여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복음의 말씀이 그 마음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또 복음은 믿고 구원받은 이들에게 그 후로 편안한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복음을 듣고 믿는 이들에게 고난과 섬김으로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복음을 주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복음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자신의 편리와 안전을 추구하는 우리의 본성과 너무 달라서 그 은혜를 누리기 전까지는 듣는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복음을 불편하게 여기는 세태를 살고 있기에,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이 복음을 말하기 위해서 많이 재고 생각하며 쉽게 입을 열어서 전하지 못합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고심하다 결국 그 복음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이 복음이 자랑스럽다면 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말하지 않을까요?
바울 사도가 살던 시절은 지금보다 더했습니다. 율법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의 저주아래 죽은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꺼려지는 일이었습니다. 영웅을 숭배하는 헬라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을 가치도 없는 것처럼 치부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잔혹한 형틀 십자가를 하나의 사랑과 연결지어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달라지 삶을 살고있는 자신을 통해 확신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방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 내가 참으로 자랑스럽게 선포하는 이 소식은, 그분의 능력 가득한 게획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 구원하신다는 엄청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오늘 내가 믿고 있는 그 복음입니다. 나는 바울과 같은 복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삶을 통해 내가 저렇게 확신차게 복음을 자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내가 바울 사도가 누린 그 깊은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아직도 복음에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내가 바울 사도처럼 진정으로 내 존재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아서는 아닌지 되돌이켜 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의로 살 수 없음을 절감하였기에 복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의를 담고있는 복음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데도 잠깐씩 내가 제법 괜찮은 존재라는 착각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 안에는 바울 사도가 경험한 그런 복음에 대한 절박한 감격이 없습니다. 확신에 찬 자랑이 없습니다.
이런 내가 이제부터라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기준을 배우기 원합니다. 내 힘으로, 내 능으로 할 수 없는 죄악의 절망에 통곡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를 내가 덧입기 원합니다. 그 의로 인해 누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즐길수 있기 원합니다. 복음이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운 그 자리에 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팀 켈러, 당신을 위한 로마서, trans. 김건우, 초판., vol. 1, 당신을 위한 시리즈 (서울: 두란노서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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