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환대를 받았고, 갇혀있던 시므온과 다시 만나 즐겁게 식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들은 그들의 목적대로 양식을 사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요셉이 시킨 사람들이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요셉의 잔을 가져갔다는 말에 형제들은 누구든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종이 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짐을 풀었을 때, 베냐민에게서 그 잔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낙심하여 자기 옷을 찢고서, 나귀에 짐을 실은 뒤에 그 도시로 되돌아갔습니다. 요셉의 집에 도착하니 요셉이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죄를 추궁하는 요셉에게 유다가 대표로 나섭니다. 그러면서 형제들 모두가 죄를 지었고, 모두가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정확하게 선을 긋습니다. 베냐민만 남기고 모두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유다는 다시 나서서 자신들의 상황 - 야곱의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베냐민을 잃으면 아버지가 돌아가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유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했던 약속을 들먹이며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늙으신 아버지를 위해 베냐민을 돌려 보내고 자신을 남겨 종으로 삼아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는 진심으로 아버지 야곱에게 한 [… 그 아이의 안전을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그 아이의 생명과 제 생명을 맞바꾸겠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무사히 데려오지 않으면, 제가 죄인이 되어 모든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약속을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그 누구도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있고,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대화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화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화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의 목숨을 담보로 걸었던 르우벤 조차 침묵하고 있는데, 오직 유다만이 나서서 문제를 책임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유다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을 팔자고 주장했던, 형제를 팔아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던 사람이었습니다.
38장에서 그러던 유다가 아들 둘을 잃고, 며느리였던 다말에게 속아 동침하여 두 아들을 얻는 사건들을 겪었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사건들이 유다에게 아픔이었지만, 아픔만큼 유다 안에 있는 무엇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아마 유다는 아픔의 시간을 보내며 깊이 생각에 잠겼을 것이고, 침묵하며 여러 상황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자신이 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생각하며 그 일들의 의미와 가져온 결과들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민과 사색만큼 유다의 삶의 깊이가 깊어졌을 것입니다.
분명 유다에게 힘들었고 어려움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고난과 아픔으로 유다를 누르고 다듬어 불순물을 뽑아 냈습니다. 유다에게 인생에 대해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같은 유다지만 다른 유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달라진 유다는 지금 자신의 말과 삶에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요셉 앞에 서 있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대신해서 종이 되더라도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고 동생을 보호하겠다는 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유다의 이런 모습은 요셉의 마음을 녹여냅니다. 유다의 이런 헌신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을 요셉을 만지는 하나님의 손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난과 아픔의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가 얻어야 할 무엇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그의 책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상처를 넘어섰을 때, 그 사람에게는 상처의 흔적이 남겨지는데 그 상처의 흔적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을 품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치유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예수님이 이미 고통을 체휼 하셔서 우리의 고통과 고난을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내 삶 속에 붙어있는 고난과 아픔을 하나님의 도구로 손길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나를 다듬으시는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