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2장 13절 - 32절
4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나오는 형 에서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야곱은 그 밤 얍복강가에서 여러 가지를 계산하고 계획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선물로 보낼 가축의 종류와 숫자를 계산해서 선별하고, 또 선물로 보내는 가축 떼와 가축 떼 사이의 거리와 시간도 나름 계산하여 맞추어 두고, 그것을 전달할 이들에게 해야 할 말들까지도 다 정해주었습니다. 이 정도면 에서의 마음이 풀어지겠다고 생각한 야곱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강을 건너기 위해 밤중에 일어났습니다. 가족들과 소유를 모두 건너 보냈을 때, 야곱은 한 사람(존재)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얍복강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실상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얍복강의 야곱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간절한 기도를 떠올리며 얍복강을 간절한 기도와 동의어처럼 사용합니다. 또한 천사와 씨름한 야곱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하는 기도의 모범으로 삼고, 우리도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기?를 기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얍복강의 기도는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만약 얍복강의 기도가 간청하는 기도라면 이 사건에 담겨야 할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간절히 매달릴 만큼의 절박함이 야곱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절박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야곱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읽어보시면 이 본문은 그런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야곱은 지금 스스로의 계획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생각했다. "연이어 선물을 받으면 형님의 마음이 풀어지겠지. 그런 다음에 내 얼굴을 보면, 형님이 나를 기쁘게 맞아 줄지도 몰라."]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선물을 나누어 보내는 자신의 계획으로 풀어냈다고 믿고 있습니다. 풀어지지 않는 문제로 고심하는 중이라면 모를까 이미 문제가 풀렸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더이상 간절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소에도 야곱이 항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던 기도의 사람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동안 보여준 야곱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절박하지도 않은데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리는 야곱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많은 설교자들이) 이렇게 오해하며 본문을 읽었을까요? 그것은 [야곱이 씨름하다] 라는 이미지가 간곡히 매달리는 이미지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불러 주시면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고 하셨는데 이를 기도의 승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기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정확하게는 자기의 계획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욕심을 내려놓도록, 자기 계획을 포기하도록, 자신의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도록 하나님이 붙들고 씨름하시는 것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파멸을 향해 가는 인생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보시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붙들고 씨름하시며 설득하신 사건이 얍복강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얍복강은 간절한 기도의 자리가 아니라, 놀라운 은혜의 자리고 애끓는 사랑의 자리입니다. 말씀을 보면 간절한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욕심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붙드심을 뿌리치려는 미련한 인생 - 야곱을, 환도뼈를 치셔서라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얍복강입니다.
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시고 불러 주신 사건이 몇 번 나옵니다. 하지만 그 사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름이 믿음의 승리 뒤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실패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기대를 담아 새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에 걸맞는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된 사건도 그랬습니다. 기드온을 향해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또 시몬을 향해 베드로(=게바:반석)이라고 부르실 때도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도 야곱이 잘해서 받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바꾸시겠다는 의지를 담으신 이름입니다.
흔히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들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구약을 보면 신약에 보여질 내용들이 어렴풋이 보일 것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개념입니다. 구약은 신약을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 어렴풋이 보이는 그림자인 것이지, 본래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는 어렴풋이 보이는 그림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현란함에 가려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물의 윤곽을 그림자를 통해 또렷이 볼 수 있듯이, 오히려 구약을 통해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야곱은 [성화 ;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는 것]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성화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은 물론 우리의 의지를 담은 노력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이렇게 찾아오셔서 환도뼈를 치시면서 까지 욕심에서 죄에서 우리를 꺼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야곱을 참 좋아합니다. 다른 넘사벽(넘볼 수 없는) 믿음의 선진들에 비해 조금은 내 수준으로도 비벼볼 만한 수준이어서 그렇습니다. (착한 천사에게도 맞아야 할 만큼 못된 수준이 야곱이었습니다) 이런 수준의 야곱조차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드러나서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열심, 한량없는 은혜가 야곱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참 감사(?)하게도 야곱은 딱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얍복강의 기억은 벧엘에서의 기억만큼이나 야곱의 삶에 흔적을 남겼고 결국 야곱의 삶을 바꾸어가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환도뼈를 맞으면서도 자기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향한 축복을 바라는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욕심에 철저하게 정직한 존재였습니다. 그랬기에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도 믿음이 있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환도뼈 조금 맞았다고 없는 믿음이 있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결국 그의 인생을 만져가시는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가장 크게 달라진 인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야곱처럼 솔직하게? 설 수 있는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내 인생에 찾아오실 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포기되지 않는 것을 포기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솔직함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그런 나의 모습에 맞게 내리신 하나님의 처방에 따라 내 인생이 변화되고 달라져 가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