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is 2022. 9. 22. 11:40

벧엘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다시 길을 떠나 동방 사람들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야곱은 이 먼길을 외삼촌 라반을 찾아왔지만, 지금 그가 아는 것은 라반이라는 이름과 과거 행적에 대한 내용뿐입니다. 이런 경우 대책 없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순간에도 야곱을 보호하십니다. 야곱은 이곳에서 라반을 아는 사람들을 만났을 뿐 아니라 그때를 맞춰 멀리에서 라반의 딸 라헬이 등장합니다. 

* 우리에게는 종종 하나님의 응답이, 인도하심이 너무 막연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시야로 보기에 막연할 뿐, 하나님께서는 미리 준비해 놓으신 그곳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막막함에 낙심하기 전에 잠깐 멈추어 하나님이 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는지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야곱은 라헬(외삼촌의 가족)을 만나기 전에 자신의 존재감을 들어냅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굴려야 한다는 우물 입구의 돌을 혼자 힘으로 굴려 내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야곱이 힘이 세다는 생각은 못 했었는데…).

그리고 극적이 효과를 위해, 그렇게 물을 먹인 다음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잔꾀를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잔꾀가 아니어도 하나님의 일은 진행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생각으로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은 성실함과 정직함입니다. 

 

감동적인 가족 상봉과 좋은 시간을 보낸 후, 라반과 야곱은 마주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합니다. 홀로 찾아온 조카에게서도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사람, 딸들마저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라반은, 지금까지 잔꾀를 부려 이익을 얻던 야곱에게 딱 어울리는 맞수로 하나님이 준비한 한 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야곱은 사랑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 대상인 라헬의 아버지 라반은 감히 야곱이 상대할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라헬과의 결혼을 위해 7년을 수일처럼 보내며 열심을 다했는데, 아침에 보니 옆자리에는 누운 여인은 라헬이 아닌 레아였습니다. 이에 야곱은 라반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야곱의 입에서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라는 항의가 터져 나옵니다. 이렇게 항의하는 야곱은 지금까지 자신이 다른 사람-가족들을 속였다는 사실을 기억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 로마서 2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비난할 때마다, 여러분은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죄와 잘못이 발각되는 것을 모면해 보려는 흔한 술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신 분이 아닙니다. 메시지 번역]  … 대체적으로 내가 가장 격렬하게 비난하는 부분은 내 마음의 욕망이 머무는 부분입니다.  나는 그런 욕망을 지금 참고 누르고 있는데, 그런 내 앞에서 그런 욕망을 드러냈기에 내가 민감하게 느끼고 또 더 크게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라반은 예상치 못한 카드를 꺼내듭니다. 다시 7년 동안 일하면 라헬도 아내로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결혼을 먼저 하고 7년을 일하라고 합니다. 이 예기치 못한 외상 결혼에 야곱은 항의를 멈추고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빠진 야곱은 라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레아]입니다. 레아는 7년동안 동생 라헬을 위해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는 야곱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 야곱은 7년을 가까이에서 지냈지만,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남자였습니다. 그렇게 7년이 지나고 라헬이 결혼하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 라반이 레아에게 결혼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야곱과 첫날밤을 보냈는데, 일어난 야곱은 자신에게 그 어떤 사랑의 말도 남기지 않고 뛰쳐나가 라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야곱은 라헬과도 결혼을 했습니다. 레아는 지금 결혼을 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남편이 없는 여인처럼 되었습니다. 레아에게 라헬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심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말씀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자녀를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그리고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라헬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한 여인의 인생에서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함은 너무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좀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에 못지 않게 힘든 것이 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과 자녀의 축복 둘 다 중요한 요소입니다. 결국 야곱의 아내들은 둘 중 하나밖에 누리지 못하는 결핍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 가정의 비극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레아가 낳은 아들들의 이름과 고백을 보면 이런 마음이 그대로 보여집니다. 첫 아이를 낳고 아이의 이름을 르우벤(보라, 사내 아이다!)라고 하고, 내가 사내아이를 낳았으니 하나님이 나의 불행을 보셨고 이제 남편이 나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이름을 시므온(하나님께서 들으셨다)이라 하고,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들으셨다라고 합니다. 셋째 아이를 낳고 아이의 이름을 레위(통하다)라 하고,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과 마음이 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넷째 아이를 낳은 후에야 아이의 이름을 유다(하나님을 찬양하다)라 하고,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라헬 입장에서는 자신과 결혼 할 것이라 믿었던 야곱을 아버지 때문에 빼앗길 뻔했습니다. 그래도 자신을 위해 다시 봉사하는 야곱을 보며 우쭐한 마음을 품을 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언니 레아는 자녀 수가 늘어가는데 자신은 아이 하나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이 자신의 주인 사라를 무시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마도 라헬이 뒤에 레아에게 무시당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였던 라헬은 자신을 사랑하는 야곱을 독점하려 했을 것입니다. (30장 15절에 보면 레아와 야곱의 잠자리를 라헬이 허락해 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야곱 가정의 문제는 깊어지고, 더 넓게 곪아가고 있었습니다. 야곱에게는 두 아내가 있지만, 둘 모두 자신만의 문제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자녀를 낳았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해 우울했고, 라헬은 남편의 사랑은 듬뿍 받고 있었지만 자녀가 없어 우울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다시 보면 레아와 라헬은 둘 다 자기가 가진 것보다는 갖지 못한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인해서 둘 다 우울하게 살고 있습니다.
****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이 둘의 모습은 나의 모습입니다. 만약 이 순간,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우울함보다 이미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가 앞설 수 있다면, 내 삶에 평강이 임하지 않을까요?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 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주신 은혜에 만족하며 살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  더 놀라운 것은 이어지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이것을 알고 나니 어떤 상황 어떤 형편에도 자족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주요 구성원들이 한사람은 열등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혀서, 한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하는 독점욕에 사로잡혀서 달려가고 있으니 가정이 편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야곱은 지금 처가살이 중입니다. 그것도 7년을 무급으로 일하며 모든 생계를 장인 손에 맡겨둔 것이니 큰 소리를 낼 상황이 아닙니다. 결국 야곱 안에도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 누군가의 욕심으로 진행된 일이 꼬리에 골리를 무는 파급력으로 인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한 사람도 편하지 못하고 모두 불편한 관계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땅의 고난과 결핍의 이유를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합니다. 다만 이 세상에는 야곱의 가정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얽혀 살고 있어서 나의 문제가 누구의 욕심, 누구의 잘못 때문인 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됩니다. 관계 속에서 내가 잠깐 욕심 부리고, 나만 생각하며 무엇을 행하면 결국 영향으로 어디엔가 있을 누군가는 불편해지고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마치 자가 격리를 지키지 않은 이들로 인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넓게확산되듯이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는 배려의 삶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내려놓아야 욕심과 고집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