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장은 요즘 소설로 비유하면, 아브라함 스토리 중 [외전-롯의 가족] 으로 끼워 넣은 스토리입니다.
1-3절
본문 속의 롯의 행동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롯을 구하실 만한 이유가 있음을 롯이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살면서 배운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롯은 나그네 대접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고 보니, 전장에서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기도하며, 단순하게 내 조카 롯을 구원해 달라는 식으로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니의 공의를 위하여, 또 소돔땅의 의인을 위해 기도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소돔을 심판 하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이끌어내 주신 것입니다.(29절)
이것이 우리가 주변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중보하였지만, 마음으로는가장 먼저 롯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돔의 멸망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자신의 사소한 바램 보다는 하나님의 의로움심을 위한 기도를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한 아브라함에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에 담긴 작은 바램조차도 이루어 주셨습니다. 기도는 말로 표현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께 전달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4-11
롯은 그 지역에서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악한 문화 속에서 살며 고통하며 신음하며 안타까워하는 존재였습니다. 천사들을 끌어내어 욕보이겠다는 소돔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꾸짖기 보다는 대신 자신의 딸들을 내어 줄테니 손님들은 해하지 말라는 모습은 선하지만 무능함에서 비롯되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 롯의 모습은 어떻게보면 오늘 죄된 문화와 세속에 남겨진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 문화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며,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내는 것조차 버거워 하는 롯의 모습은 거울로 비춘 나처럼 보입니다.
[베드로후서 2:6-8 |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함이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 롯의 상황을 아셨으면서도 롯을 의롭다고 해주셨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아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내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죄된 문화 속에 살고 있더라도, 그 문화를 즐기지 않고 오히려 안타까움과 아픔을 가지고 주를 구할 때, 주께서 그런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12-17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롯 한사람에게 만 임하지 않았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 모두에게, 롯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롯의 예비 사위들까지도 하나님은 구원의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족들의 구원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려지면,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이 나와 내게 속한 자들을 감싸안는 사랑으로 임하신다는 하나니의 약속입니다.
18-23
하나님은 롯이 산으로 가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 변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롯의 모든 요구를 받아 주셨습니다. 산이 아닌 작은 성읍 소알로 가겠다는 롯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롯이 느끼는 두려움과 그로 인한 초조함을 아셨기에, 롯의 가족이 소알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준비되었지만, 모든 것을 멈추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24-26
하나님의 분명 롯의 두려움과 초조한 마음은 이해해 주셨지만, 뒤를 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롯의 아내가 어겼을 때는 말씀대로 임하는 진노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겪게되는, 아니 나의 잘못된 기대가 만드는 어려움입니다. 이상하게도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작은 필요까지 채워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슬며시 마음 한쪽에서 다른 것들도 다 그냥 넘어가 주시지 않을까 하는 위험한 허황된 기대를 품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기록한 로마서 2장 3-4절 말씀입니다.[하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므로 여러분의 죄를 그냥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생각을 완전히 달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 하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그러나 결코 만만한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좋은 분이라는 말은, 우리 손을 꼭 붙잡고서 우리를 근본적인 삶의 변화 속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 메시지성경]
27-29
아브라함의 기도는 단지 기도시간을 보내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기도제목을 받고 기도하고 마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기도 후에 하나님이 그 일을 어떻게 진행하시는지를 게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 자신의 일을 위해 기도하고 지켜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타인을 위해 기도하고, 더구나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서, 그 뒤에 진행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정의하면 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내가 기도한, 그리고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 속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30-38
롯의 가족에게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천사들이 산으로 가라고 말했을 때, 처음부터 따랐더라면 … 이라는 가정을 하게 됩니다. 결국 롯의 가족은 산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롯은 하나님과 따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없고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이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은 롯에게 두려움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롯은 죄된 문화로부터 완전한 격리를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생긴 비극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이가 겪게 되는 아픔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폐쇄적인 삶으로, 그리고 후손들의 불행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만약 롯이 소돔의 사건을 겪은 후에, 그런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썼더라면, 차라리 믿음의 길을 먼저 걷고있는 아브라함에게로 가서 믿음에 대해 도움을 얻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면 나는 나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고 그 위기를 넘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행하였던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고백하며 살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