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is 2024. 4. 23. 23:40

8-10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 왕이 놀라서 자기 백성에게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무슨 조치를 취해야겠다. 전쟁이라도 일어나서 그들이 우리의 적군과 합세하거나 우리를 떠나 버리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견제할 방안을 강구하자.”

11-14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노역자 부대로 편성하고 공사감독을 두어 강제노동을 하게 했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를 위해 곡식을 저장해 둘 성읍 비돔과 라암셋을 세웠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가혹하게 부릴수록, 이스라엘 자손은 더욱더 불어났다. 어디를 가나 이스라엘 자손이 있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을 전보다 더 혹독하게 다루었고, 강제노동을 시켜 그들을 짓눌렀다. 이집트 사람들은 벽돌과 회반죽 만드는 일과 힘든 밭일 등 온갖 고된 노동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게 했다. 그들은 산더미처럼 많은 일과 과중한 노역을 부과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억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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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힘들게 하기 위한 일을 진행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도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맡겨진 일은 바로 성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성을 쌓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자손에게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성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나의 능력으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그 일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히브리 민족을 힘들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애굽의 바로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 일을 진행하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가 마주하는 영적 전쟁에서는 항상 이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하고싶지 않던 그 일, 정말 하지 말아야 할 그 일을 요구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나의 신음이 더 깊어지고, 영적으로 힘겨움에 지쳐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일들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분명하게 이루어 지겠지만, 그 끝과 그다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또 그 시간을 지나는 이들에게 그 시간은 항상 고난이고 슬픔입니다.

 

 

그래서 이럴 때 터져나오는 탄식은 때로는 어느 때까지인지 알게 하시면..., 그 이유라도 알려주시면... 하는 간구가 쏟아져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나님의 크고 깊은 뜻을 설명해 주셔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나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 치 앞도 알지 못하고, 그 순간 가장 좋아 보이는 것 만이 최고인 줄 알고 그것을  고집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강영우 박사님이 그의 자서전에서 [그 시절 나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이 단 한번이라도 Yes라고 답하셨다면 오늘의 강영우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밝히신 것처럼, 오늘의 나는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아니 그 뜻을 거스르는 것들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수준으로 사는 나에게는 한참 뒤에 주어질 그 어떤 놀라운 일들보다는 우선 당장 편하고 쉬운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 선뜻 받아 들 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설명을 들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어리석음이 최선이라며 하나님께 우겨댈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를 알기 원한다는 기도나 어느때까지 묻는 기도에 담긴 나의 속내는, 하나님의 계획과 때를 알고자 하는 것보다는 지금 당하는 어려움에 대한 투정이고 몸부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랑으로 위로해 주시고  말씀으로 나를 격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시는 그 가슴으로 나를 가만히 품어 주실 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자손들은 부당하게 고난으로 내몰렸습니다. 언제까지인지도 왜 이런 일을 겪는지도 모른 체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누구도 이 순간 그들을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지 못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은 이런 상황들 사이에 이런 구절을 넣어두셨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가혹하게 부릴수록, 이스라엘 자손은 더욱더 불어났다. 어디를 가나 이스라엘 자손이 있었다!] 아무리 바로가 권력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찍어 눌러도, 그가 의도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를 줄이는 것은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권력보다 더 큰 능력이 이스라엘을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분명 눈에 보기에는 바로의 권력이 강성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방법들은 다시 없을 묘책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능력도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보호하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번성을 훼방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하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이런 영적인 전쟁을 마주하게 됩니다. 적들의 공격은 날카롭고 위협적으로 보입니다.  내가 가진 연약한 믿음으로 이겨낼 수 없을 것처럼 보여집니다. 감히 상대조차 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 시간을 돌이켜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눈앞의 상황을 통해서는 보지 못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통해 그렇게 신실하시게 나를 돌보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보이는 문제를 넘어 서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은혜로 오늘을 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