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is 2024. 5. 19. 22:30

1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적어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계신 분, 일곱 금촛대의 빛 가운데를 활보하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2-3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가다가 그만두는 법이 없었다. 나는 네가 악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것과, 사도 행세를 하는 자들을 뿌리째 뽑아낸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너의 끈기와 내 일을 위해 보여준 네 용기를 알며, 네가 결코 나가떨어지는 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4-5 그러나 너는 처음 사랑에서 떠나 버렸다. 어찌 된 일이냐? 대체 무슨 일이냐? 너는 네가 얼마나 떨어져 나갔는지 알고 있느냐? 너는 루시퍼처럼 떨어져 나갔다!
다시 돌아오너라! 너의 소중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라!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이제 내가 그 금촛대에서 네 빛을 없애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6 네가 잘한 일은 이것이다. 너는 니골라 당이 벌이는 일을 미워한다. 나 역시 그것을 미워한다.
7 너의 귀는 지금 깨어 있느냐? 귀 기울여 들어라. 바람 불어오는 그 말씀에, 교회들 가운데 불어오는 그 성령에 귀를 기울여라. 승리한 사람은 내가 곧 만찬으로 부를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과수원에서 따온 생명나무 열매로 차린 잔치로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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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제자, 요한 

예수님의 12제자들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수염이 없는 곱상한 얼굴의 제자가 등장합니다. 일부 미디어에서는 여성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실은 그 곱상한 인물은 사도 요한입니다. 왜? 사도 요한을 그렇게 곱상하게 묘사했나? 의구심을 가질 수 있는데,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사도요한은 스무 살 전후에 예수님을 따른 것으로 나옵니다. 빠르면 10대 후반에서 아무리 늦게 잡아도 20대 초반의 시기에 예수님을 따랐다고 봅니다. 나이로는 열두 제자 중 막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예수님을 따랐으니, 막내로서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제자였습니다. 수제자는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의 총애를 받던 제자는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자신도 그런 사랑을 받고 있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 때문에 요한은 항상 돕는 자리에 서는 경우가 많았고 어떤 사건에서도 전면에 등장하는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가장 먼저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은 젊고 빠른 요한이었지만, 베드로를 기다리고 먼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적이 일어날 때 베드로와 함께 있었지만 모든 것은 베드로가 주관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요한은 중요한 사건에 항상 함께했지만, 항상 도우며 곁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젊고 어렸기에 누구보다 더 큰 열정과 꿈을 꾸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초대교회 공동체의 리더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 어쩌면 요한은 자시에게도 이제는 기회가 주어질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를 봉양하다

바울 사도는 훗날 갈라디아서에서 요한을 베드로와 야고보 장로와 함께 교회의 기둥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런 요한이었지만, 헤롯 아그립바의 박해로 자신의 형 야고보가 순교를 당했을 때, 요한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찾아왔을 때도 요한은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러다 유대를 향한 로마의 전쟁이 확실시될 때, 요한은 소아시아지역으로 환난을 피해 갔습니다. 요한이 이런 것들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현실의 아픔을 피하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요한이 이렇게까지 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친 마리아를 요한에게 의탁하셨기 때문입니다. 젊은 요한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기 위해 위험을 피해 다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간 요한은 한동안 교회의 사역 속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많은 교회들을 세우며 힘 있게 사역하는 동안에도 요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자신에게 부탁하신 대로 예수님의 모친-마리아를 돌보며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사역을 시작하자...  

어떻게 보면 20대 초반에서 50대, 60대까지 어떻게 보면 인생의 열정이 가장 넘치던 시기를,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역하고 싶었을 요한이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낸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우뢰의 아들이라는 불리던 매우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불같은 성정을 지닌 그가 인생의 황금기 수십년을 이렇게 보내면서 아마 그 속은 사역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 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소천하시자 비로소 요한은 다시 사역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에베소교회의 사역자였던 디모데의 초청으로 에베소교회에서 디모데를 돕는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디모데가 순교하자 요한은 비로소 에베소교회를 전담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소아시아 교회의 감독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비록 늙었지만 자신의 열정을 다해 사역을 시작했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미티안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요한은 박해로 인해 체포되었지만, 늙었다는 이유로 사형이 아닌 밧모섬 유배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기는 열정의 사람 요한에게는 누구보다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을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만 만들어가시는지, 제대로 된 기회 한번 부여받지 못하고 이렇게 되는지 고심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온 인생인데 왜 이렇게 주를 위한 사역의 기회가 막히기만 하는지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 시간들이 요한을 녹여내고 풀어내시며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가장 좋은 모습으로 요한을 다듬으시던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나에게 풀리지 않는 상황들은, 나를 가로 막고있는 문제들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이 내 안에 다듬으시고 풀어내시고 싶은 것을 만지고 계시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더라도 언젠가 이해할 수 있게 될 그날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소망으로 살더라도 한편으로는 현실에 발을 딛고 오늘을 믿음 안에서 살아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믿음으로 천국을 바라보고 그날을 기다리며 살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다듬으시는 현실을 살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관심이 있으신 예수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언제나 오늘이라는 시간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시며, 현실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현실을 통해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이 요한에게 주신 놀라운 계시의 시작이 바로 사도 요한이 살던 그 시대의 현실 교회들에게 주신 메세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의 교회를 향한 메시지 중 첫 번째 메시지의 대상은 에베소교회입니다. 에베소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기 전까지 목회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다가 밧모섬으로 유배를 왔습니다. 이 밧모섬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들의 의미를 곱씹었을 것입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사도요한의 일상 속으로 영광의 주 예수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하늘에 가득한 영광의 주님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런 시간들을 허락하신 바로 그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메세지를 받았는데 그 처음이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교회들을 모두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에게 주신  메시지는 그 다양하고 수많은 교회들 중에서도 사도 요한이 사역했던 에베소교회를 향한 말씀이 처음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이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평할 때, 자기와 상관이 없는 먼 곳의 일들을 가지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내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먼저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그 안에서 내가 오늘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에베소교회에게 주신 말씀

에베소교회에 주신 메시지에서 이 원칙은 더욱 분명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과거나 미래를 바라보시며 붙드시는 분이 아니라, 그 당시 현장에 사역하고 있는 교회의 사역자들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시고, 그 당시 현실에 존재하는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분입니다. 오늘 나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도 동일하십니다. 물론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이 되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지만,  오늘 나의 삶을 붙들고 게시며 오늘 나와 함께 나의 일상의 삶 가운데 동행하시는 분으로 찾아오십니다. 오늘의 삶에서 그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은혜누리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메세지의 내용은 먼 미래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너희가 살고있는 모습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계시록에는 장차 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천국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그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런 놀라운 계시의 처음은 지금 에베소 교회의 모습에 관한 말씀이십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해 말씀하시기를 지금 너희들이 수고하고 있는 모든 모습을 알고계시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에베소 교인들의 수고를 아시고, 인내를 아시고, 악한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을 아시고, 거짓 사도들을 밝혀낸 것을 아시고, 참고 견뎌낸 것을 아시고, 게으르지 않은 열심들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의 잘한 일들 뿐 아니라 잘못된 것들도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마음 속까지 아셔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것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알고계시며, 지금 고치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나는 예수님과 천국의 소망을, 미래에 대한 장미빛 비전들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것들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나누기 전에 먼저 나 현재를 점검하고 싶어하십니다. 나의 지금의 모습 속에 담겨진 착하고 충성된 모습을 열거하시며 칭찬해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나의 현재의 삶속에 담겨진 문제들을 꺼내 보이시며 그것들을 고치고 나은 믿음의 자리에 서도록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나 지금의 모습들을 만지셔서 나은 믿음의 자리에 서게 하신 후에, 나에게 예비된 놀라운 영광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