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is 2024. 10. 20. 23:40


8-11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다시 내게 말했습니다. “가서, 바다와 땅을 딛고  있는  천사의 손에 펼쳐져 있는 책을 받아라.” 나는  천사에게 올라가서 말했습니다. “내게  작은 책을 주십시오.” 그가 말했습니다. “이것을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꿀처럼 달겠으나, 너의 배에서는  것이다.” 나는  작은 책을 천사의 손에서 받았는데, 그것은 입에서는 꿀처럼 달았지만, 삼키자 배가 쓰라렸습니다. 그때 너는 가서, 많은 백성과 나라와 언어와 왕들을 향해 다시 예언해야만 한다”는 음성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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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아니하시며, 되어 곧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하나님의 신비가, 그분이 그동안 그분의 종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하셨던 모든 계획이 다 완성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더니 이제 요한 사도에게 천사의 손에서 책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책은 읽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책을 받아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이것은 꿀처럼 달겠으나너의 배에서는  것이다.

우리 말에는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이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 쓴 것을 참고 먹으면 결국 몸에 유익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쓴 말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맛은 입으로 느끼는 것인데, 이 말씀의 의미는 받아먹기는 쉽지만 그것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진정으로 복된 삶의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인간을 진정한 구원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를 위한 구원의 메세지가 제시되고 있다는 단순한 진실을 받아들이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 복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진실은 어려울 것도 없을 뿐 아니라 달콤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소화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참 구원의 말씀, 참 생명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소화시켜서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진통이 따릅니다. 고난과 아픔이 있습니다. 

 

지금 요한 사도가 받은 것도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심지어 이미 믿음 안에서 완숙되어 가는 요한 사도조차 그렇게 느껴지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너는 많은 민족과 나라와 언어와 왕들에 대하여 다시 예언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즉 요한 사도가 받은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이며,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듣는 것은 어렵지 않고 오히려 달콤하고 기쁘지만, 정작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기 위해서는 쓴 맛 같은 아픔과 견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말씀을 받는 모습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할 책임과 또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겪어야 할 어려움을 알려줍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기에 겪어야 하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것을 감당하는 동안 찾아오는 아픔과 쓰디쓴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기꺼이 나아가야 합니다.

분명 그런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난을 겪어야 하고, 어려움과 아픔이 있겠지만,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다는 확신으로, 우리의 진통과 수고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믿으며 오늘 하루를 버텨내고 살아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복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선지자들은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더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나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로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 달기가 꿀 같더라 고백합니다. 예레미야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함축된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기쁨만은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지만 그 심중에는 고통이 계속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의미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동포들을 생각하고, 그 결과로 당하게 될 심판을 알았기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시다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가득 채운, 유월절을 지키려고 온 유대인들이 참 유월절 어린양 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받을 심판의 진노로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그를 평강의 왕으로 환영했지만 모든 사람이 그를 환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에게는 기쁨과 아픔이 공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기쁨과 말씀을 거절한 자들이 받을 진노로 인한 슬픔과 아픔이 함께있는 것입니다. 

 

점진적 평행법 

앞에서 여섯째 인을 떼기 까지는 순차적으로 진행되다가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는 하나님께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섯번째 나팔까지는 순차적으로 불더니 일곱 번째 나팔을 앞두고 다른 내용이 삽입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카메라를 사용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영상을 찍은 것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인도 일곱째 나팔도 완전한 일곱 번째이니 완성을 의미합니다. 역사가 순차적으로 진행된 듯 지속적으로 흐르지만, 구원이 완성되기 전에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호받을 것임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더군다나 바로 앞의 6장에서는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오…라고 묻고 다음 장인 7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여줌으로 진노의 날에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게 될 존재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또한 마찬가지로 앞 장의 내용을 받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9장에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쏟으실 화가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9장의 마지막은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회개치 않고 돌아오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렇기 때문에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할 사명이 요한 사도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에게 부여되었음을 확인해 주고 계십니다.

 

환상의 궁극적 의미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역사를 천천히 진행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일들이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착한 행실로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인도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렇게 빛을 비추며 살아가는 것이 수고가 되고 슬픔이 있고 아픔일 수 있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고 살고 있다면, 이제는 그 하나님의 기쁨을 생각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이 말씀이 오늘도 나의 마음에 생생하게 들려지지기를, 매 순간 떠오르는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