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룹바알(기드온)이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니, 그의 모든 군대가 그와 함께했다. 그들은 하롯 샘 옆에 진을 쳤다.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쪽 모레 언덕 부근의 평지에 있었다.
2-3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함께한 군대가 너무 많다. 이대로는 내가 미디안을 그들 손에 넘겨줄 수 없다. 그들이 ‘내 힘으로 해냈다’고 하며 공로를 독차지하고 나를 잊어버릴 것이 뻔하다. 너는 ‘두렵거나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지금 길르앗 산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공포하여라.” 그들 가운데 스물두 개 부대가 집으로 돌아가고 열 개 부대만 남았다.
4-5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너무 많다. 그들을 데리고 개울로 내려가거라. 내가 거기서 최종 선발을 하겠다. 내가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간다’고 말하면,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군대를 이끌고 개울로 내려갔다.
5-6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개가 핥듯이 혀로 물을 핥는 사람은 한쪽에 두고, 무릎을 꿇고서 얼굴을 물에 대고 마시는 사람은 다른 쪽에 두어라.” 손으로 물을 떠서 혀로 핥아먹은 사람의 수는 삼백 명이었고, 나머지는 다 무릎을 꿇고 마셨다.
7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개울에서 물을 핥아먹은 이 삼백 명을 사용하여 내가 너희를 구원하고 미디안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 나머지는 다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8 기드온은 식량과 나팔을 모두 넘겨받은 뒤에 이스라엘 백성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삼백 명과 함께 위치를 정했다. 미디안 진은 그 아래 골짜기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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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가장 용맹함으로 추앙받는 300인의 용사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이들을 다룬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300명의 군대가 100만 대군을 상대로 시간을 끌며 버티다가 결국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내용입니다. 기드온의 300 용사가 아니라 스파르타의 300 용사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가 3번째 그리스를 침공합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황제는 크세르크세르 - 우리 성경에서는 아하수에로로 표기되는 에스더의 남편으로 알려진 왕이었습니다. 아버지 다리오왕이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다시 군대를 모으다가 죽은 후 아하수에로가 그 군대를 몰아 벌인 전쟁이었습니다.
영화와는 다르게 그리스 군대는 700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7000명의 그리스 군대는 테르모필레라는 폭이 20미터가 채 되지 않는 해안가 절벽 길에서 그리스 군대를 막아냅니다. 그러다가 한 배신자가 페르시아에게 그곳을 돌아가는 우회로가 있다는 것을 알리자 1400명을 남기고 모두 철수하게 됩니다. 이때 남은 1400명의 핵심이 되고, 지금까지 전투에서도 핵심이 되었던 이들이 바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이끌던 300 용사입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 전쟁을 묘사하면서 페르시아 군대가 육지와 바다를 합쳐서 470만 정도였다고 말하였지만, 후세 학자들은 아무도 그 의견을 믿지 않습니다. 조국 그리스의 용맹함을 강조하기 위해 부풀려진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실제로는 80만 정도였을 것이다라고 추정합니다. 이렇게 침략한 이들은 부풀려지고, 맞서 싸운 용사들의 수는 줄여서 알려지는 것들은 전공을 부풀리고, 이들을 더 큰 용사로 만들기 위해 역사 속에서 종종 일어나는 실수입니다.
기드온 이야기를 볼 때 저런 역사의 실수를 따라 반복합니다. 그래서 기드온 이야기를 대할 때 기드온과 300 용사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용사에 걸맞은 무엇인가를 갖추기 원합니다. 그래서 이들의 물 마시는 모습 - 왜냐면 이들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이들의 물 마시던 모습 밖에는 없습니다. 그 모습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의미를 부여한 해석들을 종종 대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 떠는 자는 전쟁에 도움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적진을 바라보면 물을 마셨는데 이는 영적 전쟁을 앞둔 자세라고. 이들은 진정 전쟁을 준비하는 용사들이라고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요?
먼저 성경에서는 이들을 기드온과 함께 한 자 300명으로 표현합니다. 이들은 용사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들에게 그런 부분이 필요했다면 그런 부분을 갖추게 하셨을 것입니다. 아니 이들을 그렇게 불러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드온은 큰 용사라고 부르지만 이들은 기드온과 함께한 이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의 수준을 더 높이 평가하며 그들을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들의 믿음은 정말 훌륭했어, 저 정도 되니까 믿음의 선진들이지, 그러며 그들을 자꾸 대단하게 위대하게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이 범하는 잘못 (- 실수가 아니라)입니다. 왜 실수가 아니고 잘못이냐면 의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대단하고 위대하게 보면 그렇지 않은 나 자신에게 핑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단해 그러니까 가능했지, 이런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실수를 넘어 잘못인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볼까요.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 중에 사마리아 사람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사람을 선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라고 물으신 뒤 너도 가서 이같이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 속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 속에서 누구나 살아야 할 수준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정하면 그러지 못하는 내가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보통사람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기드온의 300명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뽑으시는 과정을 보게 되면 더 잘 나타납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 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모인 32,000명이라는 수가 너무 많아서 그 수를 줄이시겠다고 하십니다. 많은 수가 전쟁을 하면 자가들이 이룬 줄 알까 함이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는 가만있어도 내가 다 할 것이다입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 털어내시는데 무서우면 가라는 것입니다. 괜히 하기 싫은데 서 있지 말고 그냥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22,000명이 돌아갑니다. 그러면 얼마가 남습니까? 10,000명이 남았습니다. 적군은 135,000명입니다. 압도적인 차이지만 아직도 일당백의 정신으로 덤벼서 이겼다고 말할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아까는 자발적으로 돌아갔지만 이제는 무엇인가 이들을 구분할 이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물가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물 마시는 시험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들을 무력으로 뽑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왕 뽑으실 것이라면 싸움 잘하고 용감한 용사들이기 원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무력을 겨루어 뽑지 않으십니다. 아니 이 테스트는 누가 합격이고 불합격인지 미리 기준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물 마시고 나누어보니 한쪽은 300이고, 한쪽은 9,700입니다. 그래서 많은 쪽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신 선발의 기준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이게 더 정확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랑할 수 없는 수준의 숫자였습니다. 전쟁에 대비한 이들의 마음가짐이나, 용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행되는 전쟁은 그런 것 전혀 필요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들은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을 들고 나아갑니다. 항아리를 깨뜨리고서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붑니다. 한 손에 횃불, 한 손에 나팔, 그러면 두 손을 이미 다 사용했습니다. 칼을 잡을 손도 없었고, 칼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아예 안 가져 갖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생각해도 될 정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속적으로 이들에게 이들이 사용될 만한 무엇인가 이유를 찾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합니다. 내가 저렇게 못하는 이유도 되고, 또 내가 원할 때 할 수 있는 이유도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실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신다는 고백의 의미입니다. 내가 하기 싫으면 미루어 두었다가, 내가 하고 싶으면 꺼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고 싶어도 실력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맞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려고 하는데 자꾸 내 자아가 살아서 그 일에 관여하며 그것이 내 힘으로 내 공로로 된 것처럼 생각하며 그 일을 방해하고 더 더디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의 끝,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가 비로소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시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여기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음을 주님 앞에서 분명하게 인정하기 위해서입니다. 매일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되지 않을 세상의 방법을 찾기보다는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때를 기대하며 기다리겠다는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