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is 2024. 7. 29. 22:30

28-32 그들이 하나님 인정하기를 귀찮아하자, 하나님도 그들에게 간섭하기를 그만두시고 제멋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자, 그야말로 지옥 판이 벌어졌습니다. 악이 들끓고, 욕망의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악독한 중상모략이 판을 쳤습니다. 시기와 무자비한 살인과 언쟁과 속임수로, 그들은 이 땅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을 보십시오. 비열한 정신에, 독기에, 일구이언하며, 하나님을 맹렬히 욕하는 자들입니다. 깡패요, 건달이요, 참을 수 없는 떠버리들입니다! 그들은 삶을 파멸로 이끄는 새로운 길을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자기 인생에 방해가 될 때는 부모조차도 저버립니다. 우둔하고, 비열하고, 잔인하고, 냉혹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뭘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나쁜 짓을 가장 잘하는 이들에게 상까지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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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던 비참한 신세였는지는 28절에서 32절의 말씀을 읽으면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말씀 가운데 나오는 불의들에 한두 가지씩은 연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불의한 일들의 목록이 하나님 아는 것을 가치 있다고(28절) 여기지 않는 우상숭배에서 시작된 죄들을 모두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내용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찬찬히 살펴보면 경제적 무질서(탐심, 29절), 사회적 무질서(살인, 반목, 속임수와 악의, 29절), 가정의 붕괴(부모에 대한 불순종, 30절), 관계의 어그러짐(우매, 불성실, 무정함, 무자비, 31절) 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이 목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을 가리켜 신학적으로는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 부릅니다. 전적 타락의 신학적 의미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항상 죄에 물든 것은 아니어도,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32절의 그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를 알면서도라는 말씀은 우리의 양심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든 누구나 옳고 그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정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논의해야겠지만, 그 범주들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합니다. 누구나 처벌받아 마땅한 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사람들은 그럼에도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찬동하기까지 합니다, 톰 라이트)고 여깁니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장려하고 부추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면 쉽게 알아차려도 나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을 알아보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문하면 조금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학교 성적이 우상이 되게끔 자녀들을 부추긴 적은 없는가? 또는 내가 누군가의 시기심에 심정적으로라도 동의하지 않았던가? 또 나는 누군가에 대한 가십을 그대로 방치하거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는 성경 말씀을 보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 관한 정확한 진단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즉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더라도, 또는 너무 비극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어는 한편만 선택할 수 없는 이 세계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원래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또 우리 안에도 그 아름다움을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깊이 성찰하며 살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 두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없이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이 없는 삶을 선택하고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그것을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그런 선택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통찰을 발휘하면 우리는 세상이 아름다운 것을 보며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세상이 비극적인 것을 볼 때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처한 딜레마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드러난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둘째, 마치 나 혼자 옳은 것처럼 고개를 내젓거나 눈을 희번덕거리며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줄곧 그런 이들을 지목합니다. 그런 이들은 바울 사도가 보기에는 이방 사회의 모습에 대해 독선적이며 종교심이 많은 유대인과 같은 부류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당신이 절대 옳소. 이 신앙심도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격노하심이 마땅하오. 바르게 살려하는 내가 특히 괘씸하게 여기는 동성애를 꼬집어 얘기해 주어서 다행이오. 내가 그들과 같지 않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하지만 이 단락은 다른 사람들은 악하고 나는 다르다는 만족감, 곧 우리 속에 있는 독선을 끄집어 내주고 있습니다. 곧이어 나오게 되겠지만 바울 사도는 이런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진단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자기만 옳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거저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1장 16–17절의 말씀 아래에서 이 대목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우상들이 내 마음과 삶에서 창조주 자리를 차지하려고 밀치고 들어올 수 있는지 아니면 이미 들어왔는지 겸허하면서도 자유롭게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어떤 상황에서 또 무엇을 대상으로 시기하고 중상하고 배신하고 욕정을 일으키는지 돌아보도록 촉구합니다. 또한 우리가 우상을 섬기고 있어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 영역에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어떻게 달라질까? 그때 내가 다른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했더라면, 나는 무엇을 느끼며 어떤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으로 나를 돌아보면서, 내 안에 가득한 욕심을 내려놓고,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된다면 피조물의 종이 되어 섬기는 대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피조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팀 켈러, 당신을 위한 로마서, trans. 김건우, 초판., vol. 1, 당신을 위한 시리즈 (서울: 두란노서원,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