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ripe Fruit | 똘기, 아직 익지못한 생각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 요한복음 11장 17-27절

Apis 2024. 5. 13. 22:30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

성경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차례 기록되어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베드로가 도르가를, 바울이 유드고를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속의 나사로를 살리셨고, 예수님 당신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외에도 죽은 엘리사의 뼈에 닿은 시체가 일어난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은 성도가 일어났다는 내용도 나오지만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제법 많은 죽음에서 일어난 사건이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 다음으로 유명하며 영향력있는 사건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믿는 우리뿐 아니라 세상적으로도 유명한 사건입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의학적으로 사망판결을 받은, 그래서 더 이상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고 장례절차를 준비하던 환자에게서 기적적으로 맥박이 발견되고 혈압이 측정되는 경우 -  쉽게 표현해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증상을 일컫는 의학용어는 '라자루스 신드롬(Lazarus syndrome)입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성경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Lazarus)의 사건’에서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잘 알려진 나사로 사건을 통해

이렇게 유명하고 잘 알려진 나사로 사건을 이 시간 다시 한번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이 제자들과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11장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으시고도 시간을 지체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표현으로 보아서는 일부러 이틀의 시간을 보내시고 움직이신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도 말씀은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사랑하는 이가 병들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야 될 것 같은데, 오히려 예수님은 그 계시던 곳에서 시간을 지체하십니다. 일반적인 이런 생각은 마리아와 마르다도 그렇게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아오신 예수님을 향한 자매의 첫 마디는 둘다 똑같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안타까움과 원망을 드러냅니다. 소식을 전했을 때, 주님이 오셨더라면 이 문제가 이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왜 그 때 반응해주시지 않으셨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능력처럼 가라 나사로가 나았다 하셨으면 되셨을 텐데 왜 그러셨어요? 

 

나의 탄식, 왜 그 때 응답해주시지 않으셨어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탄식은 나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주님 제 문제에 반응해 주세요. 주님 말씀 한마디면 충분해요. 주님의 손짓 한번이면 나를 둘러싼 문제를 날려 버리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어떤 때 주님은 나의 타들어가는 심정을 모르시는 것처럼 외면하실 때가 있습니다. 왜? 주님이 그  순간 반응하시지 않으셨나요? 아니 왜? 주님이 지금 이 순간 반응하시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지체한 이유를 이 사건을 통해 이 말씀을 읽는 자들이 깨닫기를 원하는 두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11:4). 둘째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11:15).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걸음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기 원하심 … 아직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제자들을 보시며 이들의 믿음을 더 견고히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나는 문제를 지금이 아니면 풀 수 없기에 항상 조급해하지만, 하나님은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문제를 풀어내시고 처음보다 좋게 만드실 능력이 있으시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최적의 순간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의 믿음을 위한 최고의 순간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나를 위해 기다리시는 하나님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모두에게 그는 죽은 사람으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말씀을 보니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조문하러 왔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4Km정도 떨어졌고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문상을 왔습니다. 문상이 계속될수록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게 나사로의 죽음은 사실이 되어갔습니다. 더 이상은 다른 기대와 소망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믿음을 위해 기다리고 계셨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은 두 자매에게 절망이 깊이 자리잡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나 또한 그렇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라고 말하며 믿고 기다리지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나의 믿음은 약해져 갑니다. 낙망하며 믿음의 기대를 놓아버리기도 합니다. 주변의 반응을 보면 이제는 포기하는 것이 지혜롭게 보여지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 앞에 찾아오셨습니다.

 

나의 방법으로 할 수 없어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그래서 이제오신 예수님께 마르다와 마리아는 소망과 기대가 아닌 원망과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주님이 조금만 일찍 반응해 주셨다면 좋았을텐데… 다만 이것은 내 생각입니다. 지금 내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가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시는 순간입니다. 내가 나의 방법으로 길을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길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신들은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요셉이 옥중에서 술맡은 관원의 연락을 2년 넘게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게 되었을 때,

사르밧 여인이 한 줌 남은 가루로 아들과 떡을 만들어 먹고 죽기로 결정하였을 때, 

...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혹시 너무 늦어버린 일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주님을 바라보시는 분들이 계시면 이 시간 믿음으로 그 일을 다시 돌아보기 원합니다. 그 일들에 대한 나의 판단을 천천히 헤아려보기 원합니다. 그 늦어버림이 나의 능력 안에서 늦어버림인지, 하나님께도 늦어버린 것인지 그리고 난 다음 하나님 앞에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되기 원합니다. 

 

믿음과 지식

마르다는 지금 절망 속에 있습니다. 그런 마르다가 예수님을 향해 말씀드립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절망 속에 있다면서요… 분명 믿음의 고백과 기대가 아닙니까?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는 믿음… 분명 대단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은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  아나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이 분명한 믿음의 고백이라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분명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다시 지식으로 반응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설득, 하지만 믿음은...

마르다는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당했습나다. 그 사건은 마르다를 절망에 빠트렸고, 마르다는 점차 그 사건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절망의 언저리에서 스스로를 위로할 방법을 자신이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마르다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입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 그 절망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나 스스로를 지식으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알고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나를 설득합니다. 그 상황을 재구성해서 나름 논리를 세워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나의 시도들이, 그 때 사용하는 지식과 논리가 오히려 내를 믿음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됩니다. 나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려는 시도와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묘하게 엇나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지식으로 시작되지 않고 순전한 믿음 위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지식이 아닌 믿음의 고백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이런 상황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반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가지입니다. 마르다처럼 모든 지식을 끌어와서 나의 믿음 없음을 감추든지, 아니면 믿음이 없고 부족함을 솔직함으로 주님께 아뢰든지... 이 순간 나의 선택은 평소에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했고 또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했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결국 나의 선택은 하나님에 대한 내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두렵고 떨리더라도, 내 믿음이 연약하고 부족해도 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

예수님이 변화산에 오르셨다 내려오셨을 때, 산 아래에서는 소동이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 절절매는 제자들, 그리고 거기에 서기관들이 더해서 요란스러웠습니다. 이 때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을 보고 달려온 아이의 아버지는, 할 수 있으시거든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 그 아이는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됩니다.  

분명 아이의 아버지는 두렵고 떨리는 상황에서, 연약하고 부족한 믿음으로 믿는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 앞에서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감추지 않고 예수님을 향해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이런 솔직함이 결국 믿음의 역사를 보게 했습니다. 이 시간 내가 이 모습을 배우기 원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믿음을 감추려고 온갖 논리와 지식으로 나를 꾸미기 보다는, 주님 앞에 연약하고 부족한 믿음의 상태를 고백하며 도우심을 간구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하지만 예수님은 절망에 빠져 믿음이 아닌 지식과 논리로 자신을 채워가고 있는 마르다를 그냥 놓아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런 마르다를 향해 다시 엄중하게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더 이상 마르다가 지식으로 믿음을 대신 할 수 없도록 예수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물으시며 지식이 아닌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이끄십니다. 이에 마르다는 네, 주님. 저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에 오시기로 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고 믿음으로 대답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옆구리 찔러 절받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라도 하셔서 믿음으로 일으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님이고,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선한 목자되신 에수님은 그릇된 길로 행하는 나를 가로막으시며 온전한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자꾸 믿음이 아닌 지식과 논리로 믿음 없음을 감추려는 나에게 지금 이 시간 나를 부르시면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 엄중하게 물으십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네가 나를 정말 하나님으로 믿고 사느냐? 확인하십니다.  

이 시간 내 귓가에 그 음성이 분명하게 들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거절할 수 없는 그 음성에 내가 마르다처럼 모든 믿음을 짜내서라도 주님 믿습니다 대답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주께서 이루실 놀라운 믿음의 사건들을 직접 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걸음을 걷게되기를 소원합니다.